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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Oct 24. 2024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맛

소설가 박완서의 개성음식 이야기

개성식 조랭이떡국

"개성만두는 생김새부터가 유머러스하거든요. 얄팍하고 쫄깃하게 잘 주무른 만두 꺼풀을 동그랗게 밀어서 참기름 냄새가 몰칵 나는 맛난 만두소를 볼록하도록 넣어서 반달 모양으로 아무린 것을 다시 양끝을 뒤로 당겨 맞붙이면 꼭 배불뚝이가 뒷짐 진 형상이 돼요.“

-박완서 ‘나목’ 中       


전업주부로 살다 40세에 등단한 박완서 작가는 첫 작품 ‘나목’에 고향 음식 이야기를 담았다. 미군부대 PX에서 일하던 스무살의 이경은 설날에 떡국을 먹으며 만두와 조랭이떡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이경의 실제 모델인 그 당시의 작가는 전쟁과 가난으로 고달픈 청춘을 보내고 있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마치지 못했고,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그는 과거 많은 어머니들이 그랬듯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살아왔다. 불혹이 되던 해, 화가 박수근의 유작전을 관람하게 되면서 박완서의 인생은 바뀌게 된다. 스무살 시절, 미군부대 PX에서 박완서는 초상화 그리는 화가들과 고객인 미군을 연결시켜 주는 일을 했는데 그때 만난 이가 ‘나목’ 옥희도의 모델인 박수근이다.      

어찌 보면 가장 어두웠던 시절의 기억이 빛나는 작품을 써내게 한 원동력이 된 셈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역시 자전적 내용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읜 작가에게 수재였던 오빠는 영웅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런 오빠가 북한 의용군에게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주했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했고 이때의 아픔을 소설에 담았다. 이후 박완서는 '엄마의 말뚝',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을 집필했다.


6.25를 기점으로 한 작가의 세계관은 그의 작품 면면에 녹아있다. 전쟁 당시만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이후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특히 본인이 인민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실향민이면서도, 남한 사회의 물신주의를 정면 비판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도시의 흉년’에서는 옳지 않은 수단으로 졸부가 된 일가를, 단편 ‘서울 사람들’을 통해서는 매매혼에 가까운 결혼 풍속도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아주 오래된 농담’처럼 페미니즘과 사회상을 다룬 작품도 다수 집필했다. 남성 위주였던 한국 문학계에 공지영, 신경숙, 은희경, 한강 같은 여성 작가들이 활약할 기반을 박완서가 닦아 놓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대하소설 ‘미망’은 돌아갈 수 없는 고향 개성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호화로운 보김치

MBC에서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한 미망은 개성 거상 집안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화려한 음식 묘사가 눈길을 끈다. 전처만 집안의 설치레 장면에서 작가는 ”조랑떡국 위에 예쁜 편수와 그 위에 얹은 맛깔스러운 고명이 드러난다. 보시기 속의 보쌈김치는 마치 커다란 장미꽃송이가 겹겹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갖가지 떡 위에 웃기로 얹은 주악은 딸아이가 수놓은 작은 염낭처럼 색스럽고 앙증맞았다“고 묘사한다. 읽기만 해도 그 호화스러움이 느껴진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는 예로부터 각 지역의 물자가 모여들었다. 평양, 의주를 지나 중국으로 향하는 경로가 있어 무역도 활발했다. 귀한 인삼은 개성 사람들에게 부를 가져다주었으며, 풍덕 평야와 서해안에서는 양질의 식재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개성 음식은 고려 대의 궁중문화까지 반영돼 화려하고 풍성해졌다.     

 ‘나목’에서 이경이 맛도 모르고 음식을 먹는 듯한 태수에게 개성 음식 이야기를 꺼낸 것은 ‘딱하다’는 기분에서였을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산문집 ‘호미’를 통해 ”나는 맛있는 것을 못 먹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맛없는 걸 먹는 건 참을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편수만두

설날에 먹는 떡만두국은 사실 6.25 이전까지는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다. 만두는 밀을 기르기 비교적 쉬운 북쪽 지역에서 흔하게 먹었고, 남쪽에서는 떡국에 만두를 넣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남으로 밀려오면서 냉면과 만두 같은 북쪽의 향토요리가 함께 내려왔다. 미국의 구호품인 밀가루가 많아진 것도 만두의 유행에 일조했다.      


개성식 만두는 다진 쇠고기를 주로 쓰는데 돼지고기를 섞을 수도 있다. 표고버섯, 배추, 숙주와 두부 등이 들어간다. 편수는 여름 만두로 채썬 애호박을 꼭 짜서 물기를 빼고 배추 대신 소로 쓴다. 차가운 육수에 띄워 내기도 한다. 박완서의 장녀 호원숙 작가는 ”남동생이 만두를 특히 좋아해 만두박사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만두박사는 젊은 나이에 사고사한 아들로, 박완서 작가는 아들을 잃고 나서 한동안 만두를 빚지 못했다고.      


지난 2021년 KBS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작가의 10주기를 맞아 박완서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개성 음식을 다뤘다. 호원숙 작가는 소설 속 음식들에 대해 ”외가에서 먹었던 것들이 주로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의 작품, 그리고 실제로 자주 해먹던 음식을 소재로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책 속에는 ‘그 남자네 집’에 등장하는 준치국과 파산적, 등이 언급되며 집에서 먹던 메뉴로는 소간을 부친 전과 출산 날 딸에게 만들어준 섭산적 샌드위치 외 몇 가지가 나온다.      

열구자탕

그밖에도 박완서 작품들 곳곳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미망’에 나왔던 음식들이 그 화려함 덕에 기억에 남는다. 김치만 해도 개성식 보김치는 사치스러운 음식문화를 보여주는 대표 메뉴라 할 수 있다. 낙지, 굴, 전복, 밤, 배, 석이버섯 등 값비싼 재료들을 넣은 보김치는 선물로도 주고 받을만큼 모양과 맛이 빼어나다.      


대체로 한국인들은 쇠고기를 선호하지만 개성에서는 돼지고기 사랑이 각별하다고 한다. 전처만이 특히 좋아하는 제육과 편육은 최영 장군에게 바치는 제사 음식이면서 푸짐한 안주거리다. 그런가 하면 머슴의 아이를 가진 머릿방아씨는 친정에서 제육을 썰어넣은 호박김치를 찾는다. 늙은 호박을 넣은 개성식 김치로, 김장 때 자투리 재료를 활용해 만든다. 훗날 머릿방아씨의 사생아 태남도 누이 태임에게 호박김치를 먹고 싶다고 한다. 이외에 궁중요리로만 알려진 열구자탕(신선로)과 조랭이떡, 개성주악과 인삼정과 등 군침 도는 묘사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마 막상 박완서 작가가 그리워했던 맛은 이런 호화로운 음식만이 아니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평화롭던 어린시절, 고향 박적골의 소박한 밥상을 그는 ‘호미’ 등의 산문집을 통해 언급했다. 비오는 날 먹었던 메밀칼싹두기부터 생일날마다 손녀의 액운을 막는다며 할머니가 해주셨던 수수팥떡, 논에서 잡은 참게장, 강된장, 호박잎쌈 등이다. 오늘날에는 이름도 낯선 이 음식들의 맛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인지 모르겠다.

 

개성식 혼례음식 홍해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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