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과 홍차 한잔을
명작을 탄생시킨 티타임의 수다
신사임당의 그림들을 보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이나 벌레가 대부분이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환경은 담벼락 안 세상이 거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인선이라는 소녀는 제한적인 환경에서 자신이 접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들만을 뽑아 그림과 시로 남겼다.
신사임당을 단순한 현모양처형 캐릭터가 아닌 천재적인 예술가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서양에서 신사임당과 비교할 만한 인물은 누가 있을까. 여성 차별이 심하던 빅토리아 왕조 시절의 영국, 제인 오스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오만과 편견’, ‘설득’같은 그녀의 작품들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다소 당황하는 이들도 있다. 온통 연애와 결혼 같은 소재들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이 살아가던 시절의 영국 역시 여성에게 넓은 세상을 볼 권리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환경에서 정수만을 뽑아 수백 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명작들을 집필했다.
이런 오스틴의 능력은 마치 제한된 재료만을 가지고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내는 천재 셰프의 솜씨에 비견될 만하다.
실제로 젊은 시절 그녀는 연애에 몰두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20세에 톰 르프로이라는 아일랜드 태생의 남자와 결혼까지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톰의 집안이 결혼에 반대하면서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첫인상’을 집필, 작가의 길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렇다면 그녀는 여성들의 최대 관심사였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소재를 어디에서 얻었을까. 독서를 통한 간접경험도 많았겠지만, 이런 주제는 아무래도 여자들끼리의 수다에서 주로 나오는 법이다.
오스틴 가에서 제인은 홍차를 직접 구입하고 관리하는 소믈리에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한 여러 가지 케이크와 과자 레시피를 모아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 대접했다.
이렇게 매일 벌어지는 티타임은 오스틴에게 작품에 쓸 무한한 소재를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영국 하면 홍차가 생각날 정도로 영국인들은 입에 달고 산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만큼 차를 즐긴다. 귀부인들은 저녁 식사가 마련될 때까지 출출함을 채우기 위해 차와 함께 가벼운 식사를 즐겼는데 이것이 바로 티타임의 유래다.
티타임에 나오는 애프터눈 티세트는 최근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소금 뿌린 오이를 빵 사이에 끼운 샌드위치와 스콘, 클로티드 크림과 잼, 케이크 등이 차려졌다고 한다.
당시 영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오이는 지금과 달리 값이 매우 비쌌으며, 오이 샌드위치는 부를 자랑하기 위한 메뉴였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스콘은 질감이 뻣뻣하다보니 갓 구워내 먹었을 때가 가장 맛있다. 버터처럼 꾸덕꾸덕한 클로티드 크림과 잼을 곁들이는 것이 정석. 데본셔 크림이라고도 불리는 클로티드 크림은 국내에선 찾아보기 힘들지만 필요할 경우 직접 만들 수 있다.
생크림을 아주 약한 불에 올리고 굳어진 표면을 조금씩 걷어낸다. 휘핑한 생크림에 비해 진하고 농후한 맛이 일품이다.
애프터눈 티세트의 전통적인 케이크로는 빅토리아 여왕이 즐겨 먹었다는 라즈베리 잼 케이크가 있다. 스펀지 케익에 생크림과 라즈베리 잼을 얹은 이 케이크는 소설 ‘메리 포핀스’에도 등장한다.
제인 오스틴이 살던 당시에도 브랜드 홍차가 인기였다. 특히 그녀는 지금도 유명한 포트넘 엔 메이슨이나 웨지우드, 트와이닝 홍차를 주로 구입했다고 알려졌다.
이들 업체에서는 스트레이트 홍차 이외에도 얼 그레이와 레이디 그레이, 와일드 스트로베리 등 블렌디드 티도 판매하고 있다.
홍차 한잔을 즐기며 나누는 연애, 결혼에 대한 다양한 잡담들. 그리고 이런 소소한 수다에서 힌트를 얻어 명작을 써낸 제인 오스틴. 그녀의 작품들은 후대에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비롯해 다양한 창작물에 영향을 주게 된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경제적인 어려움과 병으로 인한 이른 죽음 등 그녀의 인생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핍 속에서 자아낸 그녀의 작품들은 향기로운 홍차와 달콤한 케이크처럼 많은 이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