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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Feb 09. 2016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 삶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과 그의 요리들

전화기와 전신의 등장, 오늘날까지 파리를 상징하는 에펠탑, 유럽 각국에서 몰려온 화려한 옷차림의 관광객들…프랑스의 ‘벨 에포크’ 시절인 19세기 말, 이런 화려한 그림 내면에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상당히 ‘불편한 진실’도 숨어 있다. 


당시 서구 열강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으로 식민지를 넓히는 데 주력했으며, ‘새로운 땅’에서 가져온 온갖 귀한 보물과 자원들은 이들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 주는 데 이용됐다. 그리고 이들에게 생존의 터전을 빼앗기고, 때로는 노예로 전락한 원주민들은 마치 동물원의 동물처럼 박람회장에 전시됐다고 한다. (서구를 닮고자 했던 제국주의 일본은 만국박람회를 모방해 열린 박람회장에서 조선인들을 데려다 놓는 섬뜩한 만행도 저질렀다.)


이들이 누리던 부귀와 평화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이들의 피와 땀을 짜낸 결과였다. 그리고 만개한 번영의 껍질 아래에는 전쟁과 광기, 죽음 같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괴물들이 서서히 자라나는 중이었다.         


세기말의 흥청거리던 파리의 뒷골목에는 마치 하수구의 쥐들처럼 그날그날을 근근히 살아내는 이들이 있었다. 물랑루즈의 무용수, 서커스 단원, 가난한 예술가, 좌파 지식인, 창녀, 마부 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며 도시의 그늘을 담담하게 그려낸 화가가 있다. 바로 온전치 않은 몸 때문에 일생을 고독 속에서 살아야 했던 툴루즈 로트렉이다. 


영화 '물랑루즈' 등에서 볼 수 있는 그의 모습은 키가 152cm 정도로 작고 다리가 짧은 모습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다. 신체적 결함의 원인은 귀족 가계의 근친혼으로 인한(그의 부모 역시 사촌지간이다) 영향인 듯 하며, 게다가 사춘기 시절 넘어져서 좌우 허벅지 뼈가 차례로 부러진 후에는 키가 거의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상체 길이는 보통 성인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다리가 짧아 뒤뚱거리는 난쟁이의 형상을 하게 됐다. 입술 또한 심하게 부르트면서 발음이 어색해지자 승마와 사냥을 즐기는 시골 귀족으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한 로트렉은 그림의 세계에 빠져들어 아픔과 고독을 달래기 시작했다. 


성장한 그는 파리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로트렉은 파리 밤 문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물랑루즈에 지정석을 정해 놓고 그곳의 화려한 풍경과 환락에 젖어 흥청거리는 사람들을 화폭에 담아냈다. 다만 그는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입장은 아니었으며, 모델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한편으로 감정과 체온이 살아 있는 그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로트렉이 그림 외에 또 한 가지 몰두했던 활동이 바로 요리이다.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자랐으니 식도락을 즐기는 법을 어린 시절부터 배워왔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서일까. 그가 낸 요리책 안에는 다소 엉뚱하고 엽기적인 메뉴들이 종종 눈에 띈다. 


치즈와 크림을 이용한 바닷가재 구이인 랍스터 아메리켄느, 재로 구운 메추리, 주니퍼 열매에 담근 지빠귀, 쥐돌고래 필렛 스튜 등이 그가 생전에 즐겨 했던 요리라고 한다. '침례교인 세인트 존 식의 메뚜기 구이' 같은 알쏭달쏭한 이름도 있다.     


요리법을 묘사하는 방식 역시 독특하다. 모르모트로 스튜를 만들 때 그는 "배를 위로 하여 눕혀 놓고 코를 9월의 공기에 노출시켜 햇볕을 쪼인다"는 언급을 한다. 로트렉의 레시피 중 가장 충격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요리는 '구운 캥거루'이다. 서커스장에서 복싱을 하는 캥거루를 보고 만들었다는 이 요리는 실제 캥거루가 아닌 거대한 양고기 덩어리에 주머니를 붙여 만든 것이지만 괴이한 비주얼 때문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로트렉은 다양한 디저트도 만들었다. 초콜릿 무스의 일종인 '초콜릿 마요네즈'라는, 맛보기가 왠지 겁나는 요리가 있는가 하면 '수녀의 튀김'이라는 묘한 이름이 붙어 있으나 사실은 평범한 튀김 디저트에 럼주로 맛을 낸 것도 있다. 


최근 영국 BBC에서는 로트렉의 요리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다. 원래 레시피에는 현대에 구하기 힘든 식재료도 많은데다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도 꽤 있어서 출연한 요리사가 적당히 상상력을 가미해 만들었다고 한다. 


알아주는 술고래였던 그는 '지진'이라는 이름의 칵테일도 만들었다. 이 칵테일은 압상트와 코냑을 반씩 섞어 얼음을 넣은 와인잔에 담아낸 것이다. 그림과 요리로도 고독을 이겨내지는 못했던 것인지 그는 매일같이 독한 압생트와 코냑을 달고 살았으며, 알코올 중독을 그의 사인 중 하나로 보는 견해도 있다. 


후대 사람들은 그의 요리에 대해 "고기를 베이스로 한 묵직하고 지역색 강한 요리"라는 평을 내린다. 실제로 그의 레시피 중 상당수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남프랑스 툴루즈 인근의 '알비' 지역의 향토음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지역색을 살린 요리가 가능했던 이유는 시골에 살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식재료를 파리로 공수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로트렉의 요리를 두고 한 미술 평론가는 "그는 어린 시절 보아온 고향의 농장을 식탁으로 옮겨 놓았다"고 평가한다. 가장 화려한 시대에, 환락에 젖은 삶을 살아왔지만 결국 그가 돌아가고 싶었던 곳은 어머니가 있는 평화로운 고향 마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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