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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를 잇는 '면발'

면요리에 관한 짧은 단상들

by Sejin Jeung

어린 시절 유난히 편식이 심했던 나 때문에 엄마와 두 언니들은 꽤나 애를 먹었다. 먹는 음식이 한정돼 있다 보니 엄마도 안 계신 날, 할 줄 아는 요리가 몇 개 없던 고교생 언니는 라면을 자주 끓여주곤 했다.


한 가지 라면만 먹다 보면 물릴까봐 그랬는지 언니는 짜파게티, 스파게티 등 다양한 라면들을 끓여 주었고, 때로는 별식으로 마카로니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언니가 만든 마카로니 요리는 삶은 마카로니에 케첩과 마요네즈를 섞은 간단한 것이었지만, 왠지 이국적인 그 맛에 이끌렸다.


그러고 보면 면 요리는 입이 짧은 사람이라도 싫어하는 이가 드물다. 종류가 워낙 다양한 데다 밀가루 뿐 아니라 메밀 등으로 베리에이션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입이 짧던 나이지만 가끔씩 엄마가 백화점에 데려가 사 주시던 메밀소바는 달짝지근한 맛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곤 했다. 새콤달콤 매콤하면서 시원한 비빔냉면도 편식쟁이 꼬맹이의 입맛을 살려 주는 음식이었다.


청소년이 되어 접한 또 다른 면 요리, 스파게티는 말 그대로 신세계를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시큼한 토마토 맛에 잘 적응이 되지 않았으나 특별한 날 먹는 스파게티는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을 내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후발주자(?)인 크림 스파게티는 우유를 좋아하는 내 입맛에 딱이었다.


크림 스파게티에는 약간 씁쓸한 추억도 있다. 대학시절 짝사랑하던 선배와 연극을 보러 간 나는 점찍어 두었던 파스타 집으로 선배를 안내했다. 별 생각 없이 내가 시키는 크림 스파게티를 먹던 그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너 이거 정말 좋아해서 시켰냐?”고 물었고 나는 뭔가 못 먹일 음식을 먹인 듯한 죄책감에 그날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라면도, 스파게티도 아닌 또 다른 면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은 십여년 전 일본 여행을 가서였다. 최대한 예산을 아끼자고 마음먹은 나는 서서 먹는 가게에서 처음으로 미소라멘과 온소바를 맛보았다. 지역별로 다른 라멘이 있고, 우동도 한국에 알려진 종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요코하마에서 먹은 탄탄멘은 매운 맛이 그리웠던 나에게 충족감을 안겨준 메뉴였다. 원래는 중국에서 비빔국수로 먹었다던 탄탄멘은 일본으로 전래되면서 국물이 생기고 조금 더 매콤해졌다고 한다. 중국 짜장면이 한국으로 와 달콤하고 검은 빛깔의, 전혀 다른 음식이 된 것처럼 말이다.


한국과는 다른 나가사키 짬뽕도 별미였다. 이곳에서는 돼지고기로 육수를 내고 매운 양념을 넣지 않아 하얀 빛

깔이 난다. 한국식 짬뽕에 익숙하다면 심심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진한 돼지고기 국물과 푸짐한 해물은 말 그대로 호화로운 맛이었다. 그러고 보면 같은 면 요리도 이렇게 다양하게 진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중국인들이 즐기던 면은 한국과 일본으로 전래되면서 다양한 베리에이션이 생겨났다. 뿐만 아니라 서구로 전해져 닮은 듯 다른, 파스타라는 음식을 태어나게 했다. 가늘고 긴 면발은 동양과 서양의 가교 역할도 한 셈이다.


나에게 있어 면요리는 세대를 이어 주는 음식이기도 하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종종 서울에 오실 때마다 “세진아, 모리소바좀 해다와”라고 주문하셨다. 꽤 오래 전에 해 드린 소바가 할머니의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다.


할머니께 대접하는 것이다 보니 쯔유가 딸려 있는 제품을 사는 것은 왠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면을 뽑는 일까지는 무리였지만, 나는 할머니께 드릴 소바를 위해 가쓰오부시와 다시마로 제대로 된 육수를 내고 여기에 청주와 설탕, 간 무로 양념을 했다. 90세를 넘으신 할머니가 조금씩 소바를 드시는 모습은 왠지 나를 뿌듯하게 했다.


얼마 전 사촌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언니의 엄마인 이모는 유난히 면 요리를 좋아하셨다. 폐암으로 투병하시던 이모가 어느 날 “세진이가 옛날에 해준 국수가 먹고 싶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 국수는 요코하마에서 먹어보고 그 맛을 잊지 못해 어렵게 레시피를 찾아 재현한 탄탄멘이었다. ‘드시고 싶으셨으면 진작 말을 하시지’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짠해졌다.


면은 지역과 세대를 이어 주는 음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부와 북부의 지역 갈등이 심한 이탈리아인들도 파스타 앞에서는 하나로 뭉친다는 이야기가 있다. 심심한 맛의 평양냉면은 실향민들의 향수를 달래주며 부산 밀면은 어려웠던 피난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와 상우를 이어주는 한 마디도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것이었다.


면발이 끊어지듯, 사람과 사람의 인연도 언젠가는 끝난다. 또 누군가는 크림 스파게티를 싫어하듯 인간 세상에는 차이와 갈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 요리가 문화권을 막론해 사랑받는 이유는 내 입맛에 맞는 면발과 소스를 선택할 수 있다는, 다양성 존중의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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