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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Jan 07. 2016

디바에게 바쳐진 환상의 디저트

넬리 멜바와 에스코피에의 특별한 인연

정작 자국 내에서는 크게 유명하지 않은데 특정 지역에서만 인기가 있는 월드스타들이 있다. 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라면 낯설지 않은 이름 ‘뉴키즈 온더 블록’이나 ‘웨스트라이프’ 같은 가수들이 그 예이다.

 

하지만 반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데도 유독 한국에서는 진가를 잘 모르고 있는 스타들도 적지 않다. 대중음악계에서는 50년대 컨트리 송으로 이름을 날린 자니 캐쉬가 그렇고, 클래식 계에서는 호주가 낳은 세계적인 디바 ‘넬리 멜바’를 들 수 있겠다.


1861년 호주에서 스코틀랜드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헬렌 포터 미첼로, ‘멜바’라는 예명은 호주의 멜버른 시에서 따온 것이다. 6살의 나이로 리치먼드 국립극장에서 데뷔한 멜바는 뛰어난 실력으로 주목받았으며, 1882년 결혼 후 본격적으로 성악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 찰스 암스트롱과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결혼 4년 만에 멜바는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와 런던에서 성악 공부를 계속했다. 1887년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타’의 질다 역으로 오페라 가수의 첫 걸음을 떼었고, 곧 전 유럽이 사랑하는 프리마돈나 자리에 오른다.     


멜바는 영국의 코벤트 가든을 주 무대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빅토리아 여왕은 여성의 기사 작위에 해당하는 ‘데임(Dame)’의 칭호를 내렸으며, 지금도 멜바의 모습은 호주 100달러 지폐 표지에 실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파우스트’, ‘춘희’, ‘로엔그린’ 등 유수의 오페라에서 활약한 멜바는 만년에 멜버른 음악원 원장을 맡아 후학 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그녀가 1931년 사망한 후 미국의 음악평론가 W. 헨더슨은 “멜바의 목소리는 늘 영광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녀의 음색은 별처럼 빛나고 백열로 타올랐다. 그녀의 목소리를 신이 빚어놓은 걸작품이었다”라는 극찬을 남긴다.   


멜바의 명성을 말해 주는 일화로는 당시 프랑스 최고의 셰프로 불리던 오귀스트 에스코피에와의 인연을 들 수 있다. 넬리 멜바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는 멜바가 런던 사보이 호텔에 머물고 있을 때 그녀만을 위한 특별한 디저트를 준비한다. 얼음으로 백조를 조각하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과 복숭아를 얹은 뒤 솜사탕으로 덮어 안개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얼음 백조라는 아이디어는 전날 멜바가 공연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백조의 기사라는 의미)’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그날 공연에서 멜바가 맡은 역할은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과 사랑을 나누는 공주 ‘엘자’ 역이었다. 차가운 과일과 아이스크림을 조합한 이유는 그녀가 목을 보호해야 하는 성악가임을 배려한 것이다. 


이 요리에 감탄한 멜바가 이름을 묻자 에스코피에는 “피치 멜바라고 불러주시면 영광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최고의 요리사이며 ‘위대한(Great) 에스코피에’라고까지 불린 그가 멜바에게 이렇게까지 극진한 대접을 했다는 것은 당시 유럽에서 멜바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디저트나 제과에 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 보았을 ‘피치 멜바’는 오늘날 약간 변형된 레시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시럽에 끓인 황도 2개를 식혔다가 씨를 빼낸 부분을 밑으로 해서 접시에 올린다. 여기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스쿱에 ‘멜바 소스’로 불리는 라즈베리 소스를 얹은 것이다. 장식으로 생크림이나 아몬드 슬라이스를 곁들이기도 한다. 


참고로 멜바 소스는 곱게 간 산딸기에 슈가 파우더와 레몬즙을 넣고 고운 체에 걸러 냉장고에 차게 식힌 것이다. 새콤달콤한 맛이 특히 여성들의 입맛에 맞으며, 차갑게 혹은 따뜻하게 해서 다양한 디저트에 응용할 수 있다. 피치 멜바는 영국의 스타 요리사 중 한 명인 나이젤라 로슨도 본인 방식의 레시피를 갖고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디저트이다. 


에스코피에와 멜바의 일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멜바는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에 원숙함을 갖추게 됐지만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몸무게가 점점 늘고 있는 것이었다. 오페라 가수로서 체중 조절을 해야 하는지라 에스코피에는 또 다시 아이디어를 짜낸다. 그가 멜바를 위해 준비한 다이어트식은 식빵을 얇게 썰어 오븐에 갈색이 나도록 바삭하게 구운 작은 토스트, ‘멜바 토스트’였다.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기 위해 작게 만든 이 토스트에 멜바는 푸아그라나 야채 샐러드, 삶은 달걀과 섞은 캐비어 등을 얹어 카나페로 즐겼다고 한다. 이 멜바 토스트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다이어터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으로, 외국 마트에 가면 아예 봉지로 포장해서 팔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이어트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면 멜바 토스트 구입 방법을 묻거나 본인이 직접 만들어서 먹는 여성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굳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얇고 바삭한 멜바 토스트는 어떤 재료를 얹어도 빵이 눅눅해지지 않으며, 담백한 맛 때문에 각종 핑거 푸드 재료로 인기가 높다. 수프에 크루통 대신으로 넣어 먹으면 바삭거리는 식감이 일품이다. 멜바 토스트는 그 활용도가 높다 보니 유명 레스토랑 셰프들도 즐겨 사용하는 식재료 중 하나다. 


넬리 멜바의 초상이 최고액권인 100달러 지폐에 등장하게 된 것은 1996년으로, 당시 호주 국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역시 호주가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존 서덜랜드가 은퇴공연에서 “멜바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자긍심으로 노래했다”고 밝혔을 정도로 생전에도, 사후에도 사랑받고 있는 디바 넬리 멜바. 아직 그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클래식 팬이라면 피치 멜바와 멜바 토스트를 놓고 넬리 멜바의 노래를 감상해 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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