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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Jan 06. 2016

세기의 미녀도 포기 못한 '초콜릿'

오드리 헵번의 숨겨진 초콜릿 사랑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다면

그대의 음식을 배고픈 자와 나누어라”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이 생전에 즐겨 읊었다는 시의 한 대목이다. 이런 시를 좋아했던 인물이 ‘명사들의 식탐일기’에 등장하니 의아해 하는 독자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글래머형 미녀가 대세였던 당시 헐리우드에 깡마른 몸매를 가진 그녀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과 함께 많은 뒷말을 남겼다. 여배우들 사이에서는 그녀가 거식증에 걸렸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고. 


거식증까지는 아니지만 헵번은 항상 식단 관리와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년에는 굶주린 아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으니 더욱 식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사실은 보통 여자들처럼 달콤한 디저트나 파스타를 좋아했으며, 특히 초콜릿만은 포기할 수 없어 가끔 한 조각씩 먹어 주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의 초콜릿 사랑에는 사실 슬픈(!) 사연이 숨어 있다. 10대 시절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헵번은 나치 독일 치하의 네덜란드에서 지내게 됐는데,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기 직전에 한 네덜란드 병사가 준 초콜릿을 먹고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아사에서 구해준 음식이니 애착을 갖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초콜릿은 등산객들이 비상식량으로 챙겨갈 정도로 열량이 풍부한 음식이다. 아즈텍을 정벌하러 온 스페인 군인들이 현지인에게 얻은 카카오 음료를 마시고 기운을 차렸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때 그들이 맛본 초콜릿은 설탕이나 우유를 넣지 않아 마치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쓰디쓴 것이었다. 이 ‘쇼콜라틀’은 지금도 멕시코에 가면 맛볼 수 있는데 쓴 카카오빈에 고추를 섞은 것이어서 마셔보고 경악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본고장인 남미에서는 초콜릿을 디저트 뿐 아니라 다양한 요리에 응용한다. 대표적인 것이 몰레 소스인데 초콜릿은 단맛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맛을 더 깊게 하기 위해 넣는다. 


카카오 함량이 높은 쓴 초콜릿에 각종 견과류와 건포도, 올스파이스나 계피 같은 향신료, 여러 종류의 칠리 고추를 볶아서 간 다음 기름을 섞어가며 고깃국물에 자작하게 끓여낸다. 영화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에서 여주인공이 냄비에 끓이고 있는 진한 갈색 액체가 바로 몰레 소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십여년 전 카카오 99% 초콜릿이 반짝 유행했다가 ‘타이어 맛’, ‘크레파스 맛’이라는 악평만을 남기고 조용히 사라졌다.(타이어나 크레파스 드셔 보셨나봐요?) 당연히 쓴맛 때문이지만 가만히 음미해 보면 견과류에서 느낄 수 있는 은은한 단맛이 느껴진다. 고급 쇼콜라티에에서 파는 핫 초콜릿 역시 카카오 콩 냄새로 짐작되는 너트향이 난다.    


문제는 카카오의 함유량이 높아지면 초콜릿의 제조 단가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99% 초콜릿이 일찍 한국 시장에서 사라진 이유는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도 있다. 부자들의 음식이었던 초콜릿이 대중화된 계기는 팜유의 등장이다. 


허쉬, 네슬레 등 초콜릿 업체들은 값비싼 카카오버터 대신 팜유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단가는 내려간 대신 초콜릿의 맛과 질은 크게 떨어졌다. 초콜릿이 흔히 사먹을 수 있는 간식이 된 이면에는 제3세계 사람들을 저임금 착취했다는 어두운 부분도 숨어 있다. 이른바 ‘공정무역’ 운동도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움직임에서 시작됐다.


전세계 초콜릿 시장은 요즘 이래저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원료인 카카오의 재배 면적이 줄어든데다 팜유 생산을 위해 글로벌 기업들이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있다는 비난이 쇄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허쉬와 마스(Mars) 같은 기업들이 팜유 대신 다른 식물성 유지를 사용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업계에서는 조만간 초콜릿 회사들이 M&A를 시도하거나 가격을 인상하는 조치를 취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초콜릿은 다시 근세 유럽에서처럼 귀한 음식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굶어 죽기 직전의 기근을 경험했고, 젊어서는 만인의 연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만년에는 자신처럼 굶주렸던 아이들을 돌보며 아름다운 족적을 남겼던 오드리 헵번의 인생도 왠지 쓴맛과 단맛이 섞인 초콜릿과 닮은 듯하다. 


어쩌면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에 그녀는 인생역전을 꿈꾼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홀리나 ‘마이 페어 레이디’의 꽃 파는 처녀 이라이자에서부터, 단 하루의 달콤한 자유를 맛보는 고귀한 앤 공주까지 다채로운 역할들을 소화해 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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