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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Dec 30. 2015

'상남자' 헤밍웨이가 사랑한 술

럼과 시가로 느끼는 쿠바의 정취 

미국이 자랑하는 대문호 헤밍웨이에게는 조금 황당한 일화가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강요로 여장을 하고 그 모습을 손님들에게 보여야 했다는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됐던 것일까. 어른이 된 헤밍웨이는 그야말로 상남자(라고 쓰고 마초라고 읽는다) 캐릭터로 성장하게 된다. 호색한처럼 여러 여자들의 품을 전전하는가 하면 사냥과 낚시, 복싱, 투우 같은 남성적인 스포츠를 즐겼다고 한다. 노인과 바다’에서 바다 낚시를 하는 노인이 등장하는 것, ‘킬리만자로의 눈’의 주인공이 아프리카 사냥 여행을 갔다는 설정 등은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는 20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1차 세계대전 전장을 누비며 종군 기자로 활약했으며, 군인으로서도 무훈을 세웠다. 부상병이었을 때 만난 적십자사 간호사 아그네스와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와의 관계는 ‘무기여 잘 있거라’에 투영돼 있다.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제를 지지했던 그는 종군특파원으로 독재자 프랑코에 맞서기도 했다. 중일전쟁 때 충칭을 방문, 장제스를 만나는가 하면 2차 세계대전 때는 파리 해방전투에도 참여했으니 그의 일생은 전쟁을 쫓아간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헤밍웨이의 작품 역시 간결하고 건조한 필체로 남성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 재능이 본격적으로 꽃핀 것은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파리에 체류하던 시절부터이다. 재능 있는 무명 예술가를 지원하던 미국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과 ‘위대한 게츠비’의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등의 명사들과 어울리며 그는 자신의 글에서 표현한 대로 ‘매일 매일을 축제처럼’ 살았다. 


그는 비스트로에서 ‘녹색의 마주’라고 불리던 예술가들의 술 압생트를 즐겼고, 파리의 식도락 문화에 빠져든다. 역시나 마초답게 그가 좋아한 음식은 카사노바가 먹었다던 생굴과 정력의 상징으로 불리는 장어였다고 한다. 서양인들은 장어를 즐기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의외로 유럽에도 다양한 장어 요리들이 발달해 있다. 


프랑스에서는 각종 향미 야채와 장어를 푹 끓인 ‘마틀로트’라는 스튜가 있다. 이 요리는 피카소가 마지막 연인인 자끌린을 위해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와인과 소금으로 양념한 장어 샌드위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독일에서는 크림이 든 장어 스튜를 만들어 먹으며, 네덜란드 사람들은 훈제를 해서 먹는다고 한다. 또 스페인에서 머무르는 동안 헤밍웨이가 가장 좋아했던 메뉴 중 하나는 어린 장어 치어에 마늘과 칠리를 넣어 볶은 요리였다.  


기자로, 군인으로, 또 문인으로 화려하면서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헤밍웨이. 그러나 상남자 헤밍웨이에게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늙음’이었다. 그의 노쇠를 더욱 재촉시킨 것은 젊은 시절 전장에서 당한 부상과 말년의 비행기 사고이다. 남성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초조함에 헤밍웨이는 더더욱 사냥과 낚시 같은 취미에 매달렸고 나중에는 정신착란까지 일어나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마초 캐릭터의 상징과도 같은 그에게 만년에 위안이 되어 준 것은 쿠바의 아바나 시가와 고양이, 그리고 럼이었다. 생전에 애묘가였다던 헤밍웨이의 집에는 지금도 수십 마리의 고양이가 드나든다고 하니 의외로 여성적이고 섬세한 구석도 있었던 모양이다. 시가와 럼은 쿠바 하면 떠오르는 특산품이면서 남성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로 만드는 럼은 식민지 시대에 흑인 노예들이나 마시는 싸구려 술로 통했다. 지금도 위스키나 브랜디에 비해서 세련된 맛은 아닌 럼이 ‘신분상승’하게 된 계기는 바로 넬슨 제독과 트라팔가 해전이다. 넬슨이 이 전쟁에서 사망하자 선원들은 영웅의 유해가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럼주가 든 통에 시신을 보관해 영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짙은 갈색이 나는 다크 럼을 ‘넬슨 블러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럼은 스트레이트로 마시기도 하지만 제빵 재료로 쓰거나(대부분의 제과점이 가짜 양주 재료인 캡틴큐를 쓴다는 건 함정) 다양하게 칵테일로 즐기기도 한다. 칵테일 베이스로 쓰이는 술은 대부분 색과 향이 약하고 다른 첨가물의 맛을 방해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런 조건에 맞는 술로는 보드카와 럼, 데킬라 등이 있다. 


쿠바에서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던 럼 베이스 칵테일은 모히또와 다이키리이다. 이 두 가지 칵테일은 “나의 모히또는 라 보데기타에서, 다이키리는 엘 프로리다타에서”라는 헤밍웨이의 말로도 유명하다. 라 보데기타와 엘 프로리다타는 둘 다 그가 자주 찾았다던 단골 술집 이름이다.


스페인어로 마법의 부적이라는 뜻을 가진 모히또는 요리연구가 백종원이 아내에게 '작업용으로' 만들어 줬다는 깻잎 모히또로 유명세를 탔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의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잔 하자”는 쌩뚱맞은 대사도 이 칵테일의 인기에 한몫 했다. 상큼한 맛이 특징인 모히또를 카페베네에서는 무알콜 여름 음료로 내놓았으며, 편의점에서도 알콜 성분이 없는 캔 제품이 팔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깻잎으로 만든 모히또는 오리지널과는 맛이 크게 다르다. 원래 레시피는 라임즙을 넣은 글라스에 설탕과 민트 잎을 넣고 찧어준 다음, 잘게 부슨 얼음과 분량의 럼을 추가한다. 탄산수로 잔을 채워주면 완성이다. 럼은 칵테일 베이스로 자주 쓰이는 바카디 화이트가 무난하다. 생 민트 잎을 구하기가 까다롭다 보니 칵테일 바에서는 드물었으나, 요즘에는 이태원 등지에서 쉽게 모히또를 맛볼 수 있다.        


한편 다이키리는 쿠바 산티아고 해변 근처의 광산이름이다. 1905년 광산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기술자 콕스가 쿠바산 럼에 라임 주스와 설탕을 넣어 마신 것이 유래라고 한다. 당뇨가 있었던 헤밍웨이는 설탕을 줄이고 럼은 두 배로 넣은 프로즌 스타일의 다이키리를 마셨다고 한다. 그의 전기에는 바카디 화이트 럼에 자몽과 라임즙, 마라스키노 체리 리큐르 약간을 넣고 얼음과 함께 갈아 마신다고 나와 있다.  


럼 하면 독하고 화끈한 맛이 상남자를 연상시키지만, 이렇게 칵테일로 만들면 아기자기하면서 여성스러운 느낌이 든다. 마지막 순간까지 마초로 살았던 헤밍웨이에게도 내면에는 문인다운 섬세함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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