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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Dec 25. 2015

디킨스가 그려낸 크리스마스 만찬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음식문화와 그늘

“난 저 애를 잡아먹고 싶단 말이야.”


오래 전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한 굶주린 소년이 내뱉는 이 구절을 읽고 매우 섬뜩해졌던 기억이 있다. 소름끼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측은지심을 느끼게 하는 그의  말에, 우리의 주인공 올리버는 자기가 보육원 아침식사로 나오는 죽을 더 얻어 오겠다며 소년을 달랜다.


그러나 죽을 더 달라고 용기 내어 말한 대가는 참혹했다. 올리버는 수십 차례 매질을 당하고 골방에 갇혀 하루를 보낸다. 아이들에게 본보기로 구경거리가 됐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때 책에서 읽은 내용보다 나를 더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것은 약 십여 년 후, 대학생이 되어 배우게 된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현실이었다. 올리버와 고아들이 당하는 고통은 끔찍하게도 ‘실제상황’이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 노동자의 평균 수명은 28세에 불과했다. 성인이 일찍 죽어서가 아니라 영아 10명 중 9명이 세상 공기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들도 영양실조와 아동학대 때문에 생명을 이어가기 버거웠던 환경 탓이다. 화려한 산업혁명의 이면에는 이런 어둠이 숨어 있었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작가인 찰스 디킨스가 겪은 어린 시절도 이처럼 비참했다고 한다. 그는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감옥에 간 아버지 때문에 12살의 나이로 구두약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 때의 경험은 올리버 트위스트 뿐 아니라 ‘위대한 유산’ 등 다양한 작품에 녹아 있다. 


훗날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이 만든 ‘키드’를 보면 빈민굴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는 디킨스에 대한 오마주라고 한다. 채플린 또한 영국의 가난한 가정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디킨스 하면 떠오르는 소설은 아마 ‘크리스마스 캐럴’일 것이다. 한 구두쇠 영감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며 지금까지의 삶을 후회하고 선한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는 문화권을 초월해 감동을 주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동용으로 쓰인 텍스트를 읽었을 것이나, 원전을 보면 지금 시대에도 통할 법한 유머 코드가 숨어 있어 웃음을 선사한다.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만찬 장면을 유독 세심하게 묘사하는데, 이를 두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일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디킨스 자신의 경험과 동시에 시대상을 반영한 부분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 풍속 중 대부분은 디킨스가 살았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만들어졌다. 당시의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급속한 경제 번영과 함께, 밖으로는 식민지를 개척하며 대영제국의 명성을 쌓아 가고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은 독일의 크리스마스 트리 관습을 영국에 들여온 장본인이다. 그밖에도 왕실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즐기는 특별한 만찬을 도입했고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 카드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한다. 크리스마스는 19세기 이후 서서히 축제의 성격이 강해졌으며, 지금도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 다음날을 ‘복싱 데이(Boxing Day)’라고 해서 우편배달부나 고용인, 근로자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로 정하고 있다.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 중 주인공 스크루지가 세 번째 유령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호화스러운 만찬이 펼쳐진다. 칠면조와 거위 같은 가금류를 비롯해, 외국 영화에 종종 나오는 사과를 입에 문 통돼지, 소시지와 민스 파이, 플럼 푸딩, 생굴, 사과와 오렌지, 배 같은 과일들, 음료의 일종인 펀치도 동참한다.  


이는 실제로 빅토리아 시대에 상류층에서 즐겼던 크리스마스 만찬이었다고 한다. 칠면조 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서양식 명절 메뉴이다. 그런데 칠면조가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필수 아이템이 된 것은 아무래도 맛보다는 실용성 때문이지 싶다. 


아마 칠면조 요리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닭고기 굽듯이 그냥 구우면 퍽퍽한데다 맛은 심심하다. 그래서 칠면조를 요리할 때는 당근과 샐러리, 버섯 같은 향미 야채와 밤, 각종 허브, 때로는 큐브형으로 자른 빵조각 등을 채워 넣어 맛을 더한다. 이 ‘스터핑’은 재료를 일일이 썰어서 따로 조리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손이 많이 간다.


다만 칠면조 한 마리는 무게만 거의 10kg에 이르기 때문에 일가친척 다 같이 모여 만찬을 나누는 데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또 명절 직후 요리 프로그램에서 남은 제사음식 처리법을 알려주듯, 유럽에서는 칠면조 요리 재활용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제이미 올리버의 레시피 중에는 칠면조 살을 가늘게 찢어 샐러드에 넣는 것이 있다. 


한편 민스 파이는 조그만 타르트를 말한다. 크리스마스 만찬에는 나오지 않으나, 작은 캔에 보관했다가 손님들에게 나눠 준다고 한다. 원래는 다진 고기와 양념을 넣은 식사용 파이였으나 오늘날에는 파이 크러스트 안에 말린 과일과 사과, 감귤류 과일, 견과류, 약간의 브랜디를 넣은 디저트용으로 변모했다.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를 기다리는 어린이들이 선물로 민스 파이와 셰리주 한잔을 머리맡에 놓아두는 귀여운(!) 풍습이 있다.


힌디어로 숫자 ‘5’를 뜻하는 펀치는 쉽게 설명하자면 나이트에서 나오는 화채 같은 음료라고 보면 된다. 딱히 정해진 레시피는 없으며 2~3종류, 혹은 그 이상의 양주나 리퀴르를 섞고 각종 과일과 향신료로 맛을 낸다. 럼과 브랜디, 값싼 와인 등이 주재료이며 넓게 보면 샹그리아나 뱅쇼 등도 펀치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는 ‘스모킹 비숍(담배 피우는 주교?)'이라는, 와인에 육두구와 계피, 생강, 정향 등을 넣어 뜨겁게 마시는 음료도 나온다.


디킨스가 묘사한 크리스마스 메뉴 중 아마 가장 낯설고도 환상적인 것은 ‘플럼 푸딩’이라고도 불리는 크리스마스 푸딩일 것이다. 푸딩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나 실제로는 빵에 가까운 이 음식은 육두구, 계피, 정향 같은 향신료에 건포도와 체리 등 말린 과일, 오렌지 껍질, 견과류 등 그 시절 비싸기로 이름난 재료를 듬뿍 때려 넣어 을 소의 신장에서 나온 지방으로 뭉친 후 반죽해 만든다. 6시간동안 쪄낸 후 3주 가량 말리는 과정을 거치며 먹을 때는 독한 럼주나 브랜디를 듬뿍 붓고 불을 붙여 타오르는 모습을 감상한다고 한다.     


지금도 런던에 가면 대중 소설가로 19세기 명성을 날리던 디킨스가 즐겨 찾았다는 ‘룰스’라는 레스토랑이 무려 200년이라는 위용을 자랑하며 건재한다. 그리고 템스 강 상류에서는 디킨스의 손자 세드릭 디킨스가 개업한 ‘디킨스 인’이라는 펍을 만날 수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곳을 찾아 풍요롭고도 빈곤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모습을 체험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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