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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Dec 21. 2015

망국의 한을 달랜 냉면 한사발

고종황제의 '초딩입맛'과 냉면 이야기

대학시절 뜬금없이 재즈 음악을 배우겠다며 휴학을 감행한 친구가 있었다. 몇 개월만에 만난 그 아이는 볼살이 쭉 빠진 여윈 모습이었고, 갑자기 살이 빠진 이유에 대해 그녀는 이런 말로 답을 대신했다.


“사람이, 사는 게 재미가 없으면 먹는 낙밖에 없더라구.”


21살 나이에도 정말 ‘격하게’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물론 스트레스 때문에 여윈다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나의 경우 먹는 것으로 풀기 때문에 다이어트를 할 필요가 있으면 최대한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한다.


하긴 마땅히 즐거운 일이 없고 답답할 때, 사람들은 입을 움직이는 일이 잦다. 영화 ‘남극의 셰프’에서 대원들은 요리사에게 끊임없이 맛있고 특별한 음식을 주문한다. 라멘이 너무나 먹고 싶은 나머지 바이러스가 살지 못하는 남극에서 감기에 걸렸다며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대원도 나온다.


이 영화의 푸드 스타일리스트를 맡았던 이이지마 나오 씨의 말을 따르면, 실제로 남극 기지에는 다양한 식재료들이 갖춰져 있고 색다른 요리들이 자주 나온다고 한다. 외출도 자유롭지 않고 문명과는 동떨어진 남극에서 유일한 낙이란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망국의 한을 안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야만 했던 고종 황제에게도 유일한 낙은 먹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서구에서 들어온 커피에 가장 먼저 맛을 들인 이가 바로 고종이었으며, 그로 인해 독살될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종의 입맛은 요즘으로 치면 ‘초딩입맛’에 가까웠던 듯 하다. 그는 맵고 짠 것을 싫어했으며 술은 전혀 입에 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 영화 ‘식객’에서 고종이 마지막으로 대령숙수가 올린 육개장에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픽션이 거의 확실하다. (아니, 애초에 이 영화 자체가 문제가 많아서...)


다만 고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동치미 국물로 만든 냉면을 즐겼고, 겨울철에는 온면과 설렁탕을 주로 찾았다고. 단 것도 좋아했는지 식혜를 자주 마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특히 냉면은 고종이 가장 사랑한 음식이었으며 궁녀들과 윷놀이를 하며 새참으로 냉면을 시켜다 함께 먹었다고 전해진다.


1849년 ‘동국세시기’에는 냉면에 대해 “겨울철 시식으로 메밀국수에 무김치와 배추김치를 넣고, 돼지고기를 얹은 냉면이 있다”고 언급됐다. 또한 1848년 헌종 시절 순조비 6순과 익종비 망5 축하잔치에 냉면을 올린 기록도 남아 있다. 여기 묘사된 냉면은 돼지다리와 양지머리로 낸 육수에 배추김치와 배를 올렸다고 한다.


고종이 좋아했다는 냉면은 조금 특별하다. 배를 많이 넣어 달고 시원한 맛을 강조한 것. 아내 명성황후를 잃은 후 불면증에 시달리던 왕은 타는 속을 달래려 했음인지 이 냉면을 유난히 자주 찾았다. 고종의 8번째 후궁인 삼축당 김씨는 “배를 많이 넣어 담근 동치미국이 특징이며 편육을 열십자 형으로 얹고 수저로 둥글게 떠낸 배와 잣을 가득 덮었다”고 전한다. 여기에 달걀 황백지단을 썬 꾸미가 곁들여졌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마 전분으로 면을 뽑아낸 함흥냉면이 대세였으나, 요즘은 심심한 국물 맛에 구수한 메밀의 향을 느낄 수 있는 평양냉면 마니아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을밀대’나, ‘우래옥’에서 파는 냉면은 전통 양식의 평양냉면과는 차이를 보인다.  


중국 북경에 가면 북한 정부에서 직영하는 ‘해당화’라는 레스토랑이 있다. 오리지널 평양냉면을 기대하고 그곳에 갔던 나는, 그러나 냉면 맛에 무척 실망하고 말았다. 면발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으나 심심한 듯 깊은 고기 육수 대신, 육수와 김칫국물이 섞여 왠지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듯했다. 게다가 다대기 양념이 이미 국물에 풀려 있는 것도 불만스러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한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100% 고기 육수를 낼 수 없어 이렇게 김칫국물을 혼합한다고 한다. 한우 양지 등으로 진한 국물을 낸 서울식 평양냉면은 ‘만약 분단도 전쟁도 없었다면 오늘날 이런 맛이 됐을 것’이라는 보여주는 셈이다. 냉면 한 그릇에도 분단의 아픔이 숨어 있다.


냉면이라는 음식은 사실 마니아가 너무 많다. 오죽하면 시골 양반은 냉면을 정신없이 먹다 콧구멍으로 뿜어내고(가곡 '냉면'), 가수 이적은 사랑하는 여자를 향해 "네가 냉면보다 좋다"고 표현했을까. 그렇기 때문에 냉면에 대한 글을 쓰기를 나는 오랫동안 미뤄 왔다. 어설픈 지식으로 아는 척 한다는 악플이 달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순전히 내 취향으로만 평양냉면을 평가하자면 가격 대비 만족도는 종로 3가 ‘유진식당’이, 맛 자체로 본다면 을지로 ‘우래옥’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특히 우래옥의 평양냉면은 진한 맛을 좋아하는 이에게 추천할 법 하며, 모양새나 여러 가지 면에서 고종이 즐겼을 냉면과 가장 닮아있다. 육수는 맛이 깊으면서도 느끼하지 않으며, 고기의 풍미를 절묘하게 끌어올렸다. 이는 정말 좋은 고기를 쓰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맛이다. 여기에 듬뿍 얹혀진 배채는 냉면 육수에 시원함을 더해 1만2000원이라는 가격이 절대 아깝지가 않다.


냉면의 화룡점정은 역시 달걀 반쪽이다. 거친 메밀이 위를 상하지 않게 하도록 먼저 먹는 것이 정석이라지만, 면과 교대로 조금씩 베어 물며 노른자가 국물에 퍼지면 고소한 맛이 배가된다. 냉면 한 그릇은 고종 임금 뿐 아니라 팍팍한 삶에 힘들어하는 이들에게도 치유와 위안의 음식이다.             


고종이 냉면과 식혜로 시름을 달랬던 덕수궁 인근에는 끝나지 않는 사측과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근로자들이 있고, 집이 없어 헤매는 노숙인들도 수두룩하다.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할 만큼, 일제 강점기와 비교할 바는 아니겠으나 여전히 우리 국민들은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고종의 눈앞에 놓인 냉면 한사발에는 달고 시원한 맛과 함께, 나라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쓰디쓴 회한도 어려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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