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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Dec 15. 2015

천재 시인의 가려진 삶과 압생트

녹색 리큐르가 19세기 예술계에  미친 영향

동성애, 성소수자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이 지금보다 심하던 시절 보게 된 영화가 천재 시인 랭보의 생을 다룬 ‘토탈 이클립스’였다. 


상당히 수위 높은 동성애 베드신이 나오는데도 당시 스무살이었던 나에게 그 장면이 역겹다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당대의 청춘스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했기 때문일까. 다만 나중에야, 꽃미남 랭보가 아닌 아저씨 베를렌느가 ‘수(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분은 주위의 오타쿠 친구에게 문의를...)’였다는 걸 알고 조금 충격을 받긴 했지만....


선병질적인 천재시인 랭보를 디카프리오는 자신의 방식대로 나름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리고 그 부분이 바로 이 영화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말았다. 나는 분명히 시인에 대한 영화를 봤는데, 시보다는 잘생긴 랭보의 얼굴만이 기억에 남았으니 말이다. 


비단 영화에서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랭보라는 시인의 존재를 동성애와 기행만으로 기억한다. 그의 시가 주는 울림, 그리고 랭보가 시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세상에 대해서 자세히 이해하려는 이들은 불행히도 많지 않아 보인다. 


상당히 난해한 편인 랭보의 시 세계를 설명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굳이 키워드를 뽑아내자면 기존의 틀에 대한 격한 저항을 들 수 있다. 이런 면은 랭보가 활동할 당시 프랑스 문학계의 한 조류이기도 했지만, 그의 삶 역시 끊임없는 억압과의 싸움이었다. 


상징주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통해 “예술이 반드시 아름답고 선한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서정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에 반기를 든 움직임이었다.       


랭보는 이런 상징주의의 기조에 ‘견자의 미학’이라는 자신만의 시풍을 더해 독특하고 몽환적인 작품들을 써낸다. 세상의 온갖 억압과 굴레에 대한 그의 도전은 반항적인 소년기를 겪으면서 시작됐다.


“알렉산드라가 유명했었다는 사실이 내게 뭐 중요한가? 라틴 민족이 존재했는지 안 했는지 아는 것이 내게 대체 왜 중요하단 말이야? 그들이 살았었다 해도 그들은 나를 연금생활자 정도로 만들었을 테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 그들의 언어를 보전해 온 것 뿐인데. 내가 선생들에게 뺨을 맞고 그로 인해 고초를 겪을 정도로 잘못한 게 뭐란 말인가.” 


마치 서태지의 ‘교실이데아’를 연상시키는 이런 시를 쓰게 된 배경에는 엄격한 제도 교육과 그의 억압적인 어머니가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랭보의 어머니는 집안의 폭군으로 군림하며 자녀들에게 순종을 강요했다고 한다.    


게다가 아내의 바가지를 견디지 못한 랭보의 아버지가 집을 나가 버리면서 홀로 남은 어머니는 더욱 강경하게 자녀들을 훈육하기 시작했다. 16살이나 된 아들의 등하교길에 항상 동행할 정도였다니 웬만한 강남의 극성 엄마 뺨치는 수준이다. 


몇 번의 가출을 감행하며 내면의 에너지를 방출시키기 시작한 그는, 베를렌느의 초청으로  파리에 와 시인으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알린다. 


후일 연인으로 발전하는 랭보와 첫 만남에서 베를렌은 압생트 한잔을 권한다. 그는 이 술을 ‘시인의 제3의 눈’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19세기 파리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이른바 ‘잇 아이템’으로 불렸던 압생트는 마치 오늘날 연예인과 대마초 논란처럼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던 술이다. 


근대 유럽에서 리큐르는 대부분이 약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그 시초이다. 압생트 역시 피에르 오디네르라는 스위스 의사가 일종의 만병통치약처럼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압생트는 19세기 중반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 군대에서 약으로 쓰였으며, 전쟁 후 때마침 번진 필록세라병으로 와이너리들이 초토화되자 값싼 서민의 술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세기 파리의 예술계에서 압생트는 그야말로 인기 스타였으며, 랭보는 압생트의 취기를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이라고 묘사했다. 


랭보 뿐 아니라 고흐, 헤밍웨이, 로트렉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압생트에 취한 채 예술과 인생을 논했다.    


압생트를 마시는 방법은 조금 독특하다, 술잔 위에 작은 구멍이 뚫린 숟가락을 걸친 후 여기에 각설탕을 놓고 물을 조금씩 떨어뜨리면서 설탕물이 녹아 들어가도록 한다. 이때 초록색인 압상트는 조금씩 뿌연 우윳빛으로 변한다.


한편 체코에서는 숟가락 위의 각설탕을 압생트에 적셔 불을 붙인 다음 혼합해 마시기도 한다.    


그러나 압생트의 주 재료인 쓴쑥(웜우드)에 포함된 투존이라는 화학물질이 불안과 현기증, 근육장애 등을 일으킨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이 술은 점차 경계의 대상이 된다. 


랭보와 베를렌이 참석한 파리의 시인들 모임에서는 ‘초록빛 압생트’라는 제목의 시가 낭독됐는데 그 내용은 ‘초록빛 압생트는 저주의 음료/ 혈관을 타고 흐르는 죽음의 독약/ 아내와 자식은 빈민굴에서 울고 있는데/ 주정뱅이는 압생트를 머릿속에 부어 넣는다’는 것이었다.


반 고흐가 귀를 자르고 자살한 원인으로 지목된 술도 압생트였으며, 급기야 압생트는 한 끔찍한 사건에 연루(?)되면서 주류계에서 퇴출을 당한다. 


1905년 스위스의 한 농부가 부인과 두 딸을 총으로 살해한 일이 있었다. 사건 현장에는 압생트 외에도 포도주와 코냑 수십 병이 뒹굴고 있었으나 언론은 이 비극의 유일한 원인이 마치 압상트인 것처럼 호도한다. 이에 유럽 각 나라들과 미국에서 압생트는 금지 품목이 됐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압생트 안의 투존 성분의 악영향이 어느 정도 과장됐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다른 술처럼 지나치게 섭취하지만 않는다면 부작용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위험한 술’로 알려진 압생트에는 이런 숨겨진 뒷이야기가 있다. 천재 혹은 광기로만 이해되는 랭보 역시 시 속에 숨어 있는 자신만의 내면이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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