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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Dec 01. 2015

집밥의 여왕, 요시모토 바나나

마음 속까지 채워주는 든든한 음식들

10년도 훌쩍 넘은 2003년의 어느 겨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홀로 해외여행을 감행했다. 목적지는 도쿄. 일본의 후덜덜한 물가 이야기는 익히 들었던 터라 나는 최대한 아껴서 여행을 다녀오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다보니 주로 식사는 편의점 삼각김밥이나 빵조가리가 대부분이었다. 허한 뱃속을 채워줄 음식을 찾던 나는 만화에서나 보았던 돈까스 덮밥, 가츠동을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가게로 들어갔다.  


푸짐한 돈까스에 부드러운 달걀이 올라간 가츠동을 한 입 한 입 먹으며 고소하면서 달달한 감칠맛과 함께 온 몸에 온기가 채워지는 듯 든든함을 느꼈다. 가츠동 한 그릇 덕분에 나는 하루 종일 도쿄 시내를 돌아다니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기운이 샘솟았다.


별 관심이 없던 일본문화를 탐색하게 된 계기도 그때의 여행이었다. 특히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에서 따끈한 돈까스 덮밥을 들고 남자친구에게 달려가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 포근한 감동을 받았다. 


일본 음식 하면 병아리 모이만큼 적은 분량에 ‘잉여스러운’ 장식이 과하게 가해진 모습을 흔히 떠올린다. 하지만 요즘에는 홍대나 이태원 등지에 일본 가정식 레스토랑이 속속 생겨나다보니 일본음식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도 바뀌고 있다.     


음식 묘사에 공을 들이는 일본 작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모토 바나나 등이 있다. 하루키가 호화로운 서양식 메뉴 혹은 깔끔하다 못해 밍밍한 건강식을 주로 묘사하는 반면, 요시모토 바나나는 엄마의 밥상 같은 푸짐하고 소박한 요리들을 다룬다. 


일본에서 덮밥, 돈부리는 바쁜 직장인들이 싼 가격으로 푸짐하게 먹는 요리라는 인상이 강하다. ‘키친’ 단편집에 실린 ‘달빛 그림자’라는 작품에는 사고로 남자친구를 떠나보낸 여주인공의 입맛을 살려주는 메뉴가 등장하는데 바로 굴튀김 덮밥이다. 


신선한 겨울 굴에 밀가루, 달걀,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 굴튀김은 굴을 싫어하는 이들에게도 거부감이 적은 별미이다. 고소한 타르타르 소스에 찍어 먹어 맥주 한잔을 곁들여도 좋고, 소설에서처럼 간장 양념을 뿌려 밥 위에 올려 먹으면 든든하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자신과 지인들의 식생활을 소재로 한 ‘바나나 키친’이라는 수필집도 펴낸 적이 있다. 그 맨 마지막 장에 가면 그녀의 언니가 만드는 고로케 레시피가 나온다. 으깬 감자에 생크림을 듬뿍 붓는 등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조리법이지만, 왠지 엄마가 해주는 어린 시절 간식 같은 친근함이 묻어난다. 


바나나의 작품에는 한국음식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게 묘사돼 있다. ‘김치꿈’이라는 단편을 보면 한때 불륜 커플이었던 부부가 전부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느끼는 매개로 김치와 꿈 속에서 보는 한국의 어느 시장이 등장한다.     


또한 ‘바나나 키친’의 첫 장에는 한국의 지인이 보내준 김치에 이것저것 나름의 재료를 추가해 찌개를 끓여 먹으며, 그 얼큰한 맛에서 한국 어머니의 자상함을 느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그밖에도 그녀는 필리핀인 가정부가 해주는 가지구이, 커리, 아도보 같은 요리의 이국적인 맛에 빠져드는가 하면 태국인 친구가 입에 달고 다니는 주전부리와, 동남아 음식 전문점에서만 파는 다양한 식재료들을 함께 즐기기도 한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작품 속에서 묘사하는 음식들은 그저 소재에 그치지 않고 안타까움, 행복, 슬픔, 고독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함께 담고 있다.  


바나나의 작품에는 유독 평범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가령 ‘도마뱀’의 남자 주인공은 작은아버지가 어머니를 강간해 태어났다는 어두운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다. 


N.P.에서 주인공의 친구 역시 복잡한 근친상간의 관계에 엮여 있으며, 네이버에 연재되기도 했던 ‘그녀를 위하여’는 친모의 딸 살해라는 극단적인 소재가 나온다. '키친'에 등장하는 트랜스젠더 아버지는 물론이고 말이다. 


언뜻 보기에는 막장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런 설정들은 그러나, 바나나의 시선과 글에 의해 따뜻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독자에게 전해진다. ‘다름’이나 ‘상처’가 결코 흉이나 비난받을 점이 아니라는 메시지는 그녀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             


내가 예전에 만난 한 사람은 조선족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저 사람들 다 내보냈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겉모습이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는 너무 쉽게 남을 배척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들은 이런 차가운 세상에서 나와 다른 이, 혹은 상처 입은 이를 포근히 감싸는 온기를 전해주고 있다. 마치 가난한 배낭여행족의 배를 든든히 채워준 가츠동 한그릇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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