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jin Jeung Mar 09. 2018

요즘 미투운동에 부쳐...

사실 이 소설은 지난해 한 문학상에 공모했다 낙선한 단편입니다.

낙선작이니 작가 브런치에 실어도 문제는 안되겠지요?

졸작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심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글을 쓴 시기는 작년 포항지진 직후입니다...)


어느 영화감독의 72시간      


“쿠루릉 쾅!”     

잠시 눈을 감았던 김상신 감독은 주변이 흔들리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는 얼마 전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고, 처와 아들이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아무도 없는 빈 병실에 혼자 누워 있다. 아내가 옷가지며 약들을 놓아두던 캐비넷도 없고 삑삑거리는 의료장치들도 보이지 않는다. 1인실에는 그가 누운 침대를 빼놓고는 텅 비어 있으며 온통 흰 벽만이 주위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누...누구 없소!”     

김상신 감독은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했다. 그러나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는 일어서려고 해 보았다. 하지만 가위에라도 눌린 듯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람...어리둥절하고 있던 차에 문이 열리고 다소 야비해 보이는 인상의 30대 남자가 검은 옷을 걸치고 들어왔다.      

“안 깨어나나 했는데 정신이 들었구려, 당신은 아직 죽은 게 아니니 맘 놓으시오”

“그? 그게 무슨 소리...? 자넨 누군가?”     

남자는 조금 골치 아프게 됐다는 듯 호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다. 말기 암 환자가 있는 병실에서 담배라니? 김 감독은 기가 찼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영화감독이니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알거 아니오. 난 이승 사람들이 말하는 저승사자요.”

“...저승사자면...날 데려가려 온 거요?” 

“그럴려고 했는데...일이 좀 복잡하게 꼬였소. 오늘 갑자기 땅이 흔들리면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깨져 버렸거든. 복구하려면 3일이 걸리는데 그 사이에 당신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가 된 거지요.”

“....??”     

김 감독은 너무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역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저승사자는 땅바닥에 담뱃재를 털며 말을 이었다.      

“이런 실수는 사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보니, 오늘 데려가야 할 망자들에게 보답으로 염라대왕께서 기회를 주기로 했소.”

“기회라니...무슨...?”

“앞으로 72시간 동안, 당신이 절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이가 나타나면 천수를 누리게 해 주는 기회지요. 다만 낳아준 부모는 제외.”     

김 감독은 생각지 않은 이야기에 금새 얼굴이 화색으로 가득했다. 50대 나이에 뜻하지 않게 암을 얻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자신이 살 수 있다니...     

“염라대왕도 예술의 가치를 알아보는 분인가 보구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런 사람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오. 내가 한 사람씩 데려다 줄 테니”     

저승사자는 어디서 구했는지 거대한 모래시계 하나를 김 감독의 눈에 잘 띄는 발치에 놓아 두었다. 반짝이는 모래들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의 표정은 밝았다.      

‘암, 72시간이 아니라 한 시간 안에 구할 수 있을 거다. 내 영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는데’      

김 감독은 유럽의 몇몇 영화제에서 받은 트로피들, 그리고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고자 했던 수많은 톱스타들을 떠올렸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내 곁에 와준 그녀는 어떻고...      

‘이제 난 다시 사는 거야. 이 김상신의 전설, 아직 안 끝났다고’     

살 수 있다는 기쁨에 들뜬 나머지 어린애처럼 헤벌쭉 웃던 김상신 감독은 어느 새 저승사자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갑자기 눈앞에 안개 같은 흰 구름이 가득 덮여 왔다.      

‘뭐야, 이 녀석 설마 나한테 사기친 거?’      

어리둥절하고 있던 김 감독은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새 그의 육신은 기력을 되찾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앉은 상태였다. 그러는 사이에 조금씩 눈앞의 안개는 걷히고 양복을 차려 입은 초로의 외국인 너댓명이 그가 누운 침대 곁에서 무언가를 두고 열심히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외모에 프랑스어. 그렇다. 그들은 김상신 감독이 C 영화제에서 황금바나나상을 받았을 때의 심사위원들이었다.          

‘오, 그렇지. 나의 예술성을 높이 산 이 분들은 당연히 내가 살기를 바랄거야.’     

김 감독의 얼굴에는 다시금 웃음이 피어올랐다. 어라, 그런데 다들 왠지 표정이 심각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귀를 기울여 보니 이들은 분명 프랑스어로 떠들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슈 김의 영화는 확실히 새로웠어. 낡은 유럽영화가 보고 배울 것이 많았다고.”

“하지만 새롭다는 건 그 때 뿐이지. 관객은 또 다른 새로움을 찾게 마련이거든.”

“솔직히 여권이 강한 우리나라에선 찍을 수 없는 작품이다 보니 점수를 받은 거잖아.”      

갑론을박이 오가더니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로만 베르나르치 감독이 난감한 표정으로 김 감독 앞에 섰다.      

“자네 영화를 높게 사서 살려 달라 하고 싶었지만 다른 이들의 반대가 심하군. 게다가 난 요즘 내 영화에서 실제로 강간당한 여배우가 자살하면서 뭇매를 맞고 있어. 그동안 거장으로서 쌓아온 명성이 죄다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고.”     

베르나르치 감독은 침울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그...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제 작품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받아들이기 쉽진 않지만 세상은 변했다네. 우리로서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김상신 감독은 무언가 항의의 말을 하려고 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심사위원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 작품이...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예술의 가치는 그대로라고!! 내 천재성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이 무슨 망발이야?“     

저예산으로 관객이 10만도 채 들지 않는 영화를 찍어 오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김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상업영화에 익숙한 수준 낮은 관객들 대신 외국의 평론가들에게 상을 받자 그는 단숨에 거장이 될 수 있었다.      

“고만고만한 오락영화 만드는 놈들이 뭐가 잘났다고!”     

울분을 삼키며 주먹을 꼭 쥔 김 감독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래, 그녀라면 내가 살기를 바랄 것이다. 나이도, 세상의 비난도 뛰어넘은 예술적 사랑이니까. 그녀는 지금 어디...?     

홀연히 주위를 둘러보니 또 다시 짙게 깔렸던 안개가 걷히면서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함께 영화를 찍으며 사랑에 빠졌던 선하였다. 데뷔 초부터 예쁜 외모로 CF 여신으로 이름을 날려왔지만 배우로서는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던 그녀의 잠재력을 발굴한 건 바로 김 감독의 힘이다. 그녀는 그와의 첫 촬영 때 입었던 고혹적인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다리를 꼰 채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그날 둘은 스텝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뜨거운 첫 밤을 보냈었다.      

“선하야, 네가 와 줄 줄 알았어! 어서, 어서 내가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게.”     

그러나 선하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잠시 후 그 인형 같은 표정은 싸늘한 미소로 변했다.      

“감독님, 다 아시는 분이 왜 그래요?”     

김 감독은 순간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그에게 다가온 선하는 하얀 침대 위에 담배를 비벼 껐다.      

“난 감독님 덕에 그냥 연예인에서 배우가 될 수 있었죠. 우리의 사랑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나를 더 정열적이고 예술에 모든 걸 거는 여자로 만들어 줬구요. 이 시점에서 당신이 불치의 병으로 떠나면 난 더 비극적인 연인이 되겠죠? 마치 마르셀 세르당을 사고로 잃은 에디뜨 피아프처럼 말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선하는 곱게 칠한 입술을 잠시 샐쭉거리며 답했다.      

“난 알고 있어요. 내가 늙고 매력이 없어지면 당신은 다시 다른 여배우를 찾으리라는 걸. 구질구질하게 버림받은 여자가 되느니, 멘토이자 연인을 잃은 배우 쪽이 훨씬 매력적이지 않겠어요?” 

“선하야, 난! 우리 사랑은...?”

“사랑은 아쉬울 때 떠나는 게 가장 아름답다고... 그 말을 한건 감독님 자신이 아니었나요?”     

김 감독은 시야가 흐려져 오는 것을 느꼈다. 이럴 수는 없다... 모든 걸 버리고 날 택한 그녀가 날 이용했다니! 그는 목이 아프도록 선하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녀의 빨간 원피스도, 인형 같은 자태도,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주변은 웬일인지 서늘해져 왔다. 김상신 감독은 알 수 없는 한기가 드는 것을 느꼈다. 거장인 내가, 연인한테마저 버림받다니. 그래, 예술을 한다고 주변 사람들을 소홀히 하긴 했지.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난 남기지 않았던가...     

다시 그의 눈앞에 안개가 피어올랐다. 이번엔 누가 나타날까 조마조마하던 순간, 익숙한 두 사람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아내와 장성한 아들이다. 김 감독은 약간은 찔려하면서도 안도했다. 가족만큼은 내가 살기를 바랄 것이다.      

“여보, 민석아!”     

그는 힘주어 두 사람을 불렀다. 두 사람은 그를 보더니 잠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아들 민석이 그녀를 제지하고 나섰다.      

“아버지. 아니 김 감독님. 마음이 급하셨나봐요. 나 몰라라 하던 처자식까지 찾은걸 보니...”     

김 감독의 젊은 시절을 빼닮은 아들의 표정은 차갑고 무뚝뚝했다. 아내는 다소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그 눈에는 한없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진 제 학비로 그 여자의 생활비를 대주셨죠? 스캔들로 연예계 활동이 힘들 거라면서. 전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서 영화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그 꿈은 아버지 욕심 때문에 산산조각나고 말았어요”          

“민석아, 그건 말이다.”

“엄마는 아버지 불륜 사실에 실어증까지 걸리셨어요. 간통죄로 고소를 해도 모자란데 가정을 지키겠다며 혼자 버텨 오신 거라구요.”     

그는 아내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아직 50이 되지 않은 나이인데도 하얗게 센 머리에 주름진 얼굴이 할머니라고 해도 누구나 믿을 정도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내를 보며 그는 한층 더 마음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문득 수십여 년 전, 아내와 뉴욕에서 영화 공부를 하던 시절이 스쳐갔다. 그 무렵의 그녀는 생기가 넘치고 예술에 대한 열정에 가득 차 있었다. 그의 감독 입봉을 위해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넘겨주기까지 했던 젊은 예술가의 모습은 사라지고, 남편의 그림자로 살아온 ‘아내’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말문을 탁 막히게 한 것은 아들의 다음 말이었다.      

“아버지, 지금 돌아가시는 게 그나마 우리한테 남은 도리라도 하는 거예요. 엄마하고 전 이혼 전에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고, 아버지 영화의 판권은 우리한테 넘어오죠. 마침 곧 있을 김상신 감독 회고전 놓고 기자들이며 평론가며 아주 기대가 크거든요.”     

아까 들은 선하의 말보다도, 아들 민석의 차가운 말에 등골이 오싹해 왔다.      

“네, 네놈이 이 아비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그러는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셨나요?”     

김 감독은 더 이상 일어나 앉을 기운도 없어 자리에 누워 버리고 말았다. 민석은 아무 말도 없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돌아섰다. 아내는 그저 끊임없이 울기만 할 뿐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모든 건, 아버지가 자초한 일입니다.”     

다시 시야가 흐려졌다. 김 감독의 입에서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절망이라는 감정이 차갑고 촉촉한 벌레처럼 그의 피부 위를 기어다녔다. 잠시 후, 눈앞에 나타난 사람들의 원망과 조소를 들으며 그는 마치 죽은 것처럼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 덕분에 영화계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 스탭과 카메라맨들이 하나씩 그의 눈앞을 스쳐갔다. 그들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 김 감독의 언행을 욕하며 차갑게 돌아섰다.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던 중견배우 김명식, 톱스타 A, B, C...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가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누군가는 그가 예술성만큼 인간성은 좋지 않다고 비난했다.      

특히 많은 비난을 했던 이는 여배우들이었다. 초창기 신인으로 촉망받다가 사전 합의 없이 찍은 베드신 때문에 영화계를 떠난 배우의 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다. 촬영 현장에서 상대 배우에게 성추행을 당한 배우도 있었다. 몇몇 배우들은 그와의 '예술적 결합'을 강간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녀들의 독기 어린 눈빛에 김 감독은 소스라치게 몸을 떨었다. 자신과 함께 영화를 찍는다고 해서 들뜨고 기뻤던, 그리고 아름다웠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왜 이렇게 날 싫어하는 거야? 내 영화가 어려워서? 대중적이지 못해서...?’     

김 감독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조금씩 체념하기 시작했다. 베르나르치 감독의 말처럼 세상은 변하고 만 것인가...     

‘여배우가 노출을 꺼리고 몸을 사리는 건, 결국 프로이길 포기한 짓 아닌가. 난 감독으로서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러면서 죽음의 순간에 흔히 그러하듯, 지나온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거의 눈앞을 스쳐가기 시작했다. 막 태어났을 때, 가난한 환경에서도 그림을 그리며 꿈을 키워왔을 때,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영화 스크립트 일을 시작했을 때....     

김 감독은 문득 한 장면에서 멈춰 섰다. 중학교 1학년 때의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누군가 쓰다 버린 스케치북에 다 닳은 몽당연필로 누군가를 그리고 있었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김 감독은 숨을 죽이며 문틈을 훔쳐보았다. 수줍은 나신을 하얗게 드러낸 그 또래 소녀가 몸을 씻고 있었다. 몽글몽글한 작은 거품들이 구슬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다. 거품 사이로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작은 젖가슴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눈처럼 새하얀 살갗과 새까만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김 감독은 몸의 한 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야....나의 뮤즈...”     

김 감독은 비몽사몽 중에 중얼거렸다. 그의 옆집에 살던 중학교 3학년 누나. 새침한 표정에 샴푸 냄새가 풍기는 양 갈래 머리로 온 동네 남학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던 그녀였다. 지금 그녀의 이름은 잊었지만 숨어서 몰래 그린 누드화만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서랍 속에 고이 감춰져 있다. 그렇다. 김상신이라는 남성을 예술가로, 감독으로, 세계가 알아주는 거장으로 키운 장본인은 바로 옆집 누나였다. 그런 그녀는...나를 살게 해줄까...     

모래시계의 모래들이 이제는 한 줌 정도밖에는 남지 않았다. 저승사자가 말한 72시간은 어느 새 거의 다 지나 있었던 것이다. 김 감독의 체념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깊어져만 갔다. 달뜬 그의 숨결은 어느새 조용하고 규칙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는 오지 않을 것이다. 온다고 해도 나를 살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가난한 옆집 동생은 공주처럼 빛나던 그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 존재였으니...      

갖지 못한 그녀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김 감독은 많은 영화에서 순결하고 고귀한 여주인공들을 짓밟고, 창녀로 만들었다. 부잣집 여대생은 사창가로 팔려갔다. 똑똑하고 아름다운 아내는 윤간당한 후 살해당했다. 페미니스트들은 그의 영화를 혐오했지만, 평론가들은 ‘날 것 그대로’의 인간 본성을 그려낸 그에게 열광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영화이고 예술일 뿐이다. 카메라 앞에서 옷을 벗는 일이 그녀들의 인격을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야동을 보는 남자들도 그 정도 판타지는 갖고 산다. 실제로 죄만 짓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닌가...     

어둑어둑해지던 그의 시선 앞에 다시 한 번 짙은 안개가 깔렸다. 이제 저승사자가 올 시간인가...눈을 감았다 뜬 그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의 뮤즈, 옆집 누나가 서 있었던 것이다. 김 감독은 그녀를 똑바로 보기 위해 눈을 다시금 깜빡였다. 그녀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무렵 그가 보았던, 맑고 빛나던 눈동자는 더 이상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크고 맑은 눈은 원망과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새침했던 입술은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보랏빛으로 부푼 모습이었다. 그녀가 항상 입고 다니던 하얀 블라우스는 어찌된 일인지 이곳저곳 찢겨진 상태였다. 너무나 변해 버린 뮤즈의 모습을 보고 김 감독은 그만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한 발짝 두 발짝 다가섰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는 중년의 사내에서 소년으로, 조금씩 젊어졌다. 소년의 목소리로, 김 감독은 그의 뮤즈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누나?”     

뮤즈는 싸늘함과 노기가 섞인 눈길로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뇨?”     

그녀는 한 장의 그림을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오래 전 그가 그린, 목욕을 하던 뮤즈의 나신이었다.      

“이 그림을 넌 자랑삼아 친구 한두 명에게 보여줬지. 그림의 복사본은 곧 온 동네에 퍼졌어. 어느 날 너희 학교 아이들을 포함한 여럿이...그날 내 여자로서의 삶도 끝났어.”     

김 감독은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런 결과를 예상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린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건 내...내 책임이 아니에요.”     

겁에 질린 김 감독의 말에 뮤즈는 다시 한 번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날 정말 분노하게 만든 건 그 사건이 아니야. 그 후로도 넌 나 같은 희생양을 수십 명 이상 만들어냈어. 영화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네 아내도, 애인도, 결국은 네 이기심을 위한 제물에 불과했어.”        

“....”

“너, 뮤즈란 말의 뜻은 아니? 뮤즈는 남자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예술을 창조하는 여신이야. 넌 여신이 될 수 있는 여자들의 날개를 꺾어 버렸다고.”     

김 감독의 머릿속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여신이었던 그녀의 말에 그는 더 이상 반박 할 수 없었다. 이대로 나는 죽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 순간, 뮤즈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네가 죽기를 바랄 것 같지?”

“......”     

아니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를 원망하고 있다니...      

“하지만 이대로 네가 죽어버리는 건 덜 잔인해. 널 살려주는 대신, 난 네 머릿속에 든 작은 주머니 하나를 가져갈 거야. 네 상상력의 원천이 됐던 바로 그거.”     

그녀의 말에 그는 그만 몸서리를 쳤다.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다시 중년이 된 김 감독은 소리쳤다.      

“그, 그것만은 남겨 두세요. 그게 없으면 난 영화도, 예술도 할 수 없는 쓰레기일 뿐이에요!”

“쓰레기는 그냥 쓰레기로 살아야지. 왜 사람이 되려고 했니.”     

서늘하고도 슬픈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사라져갔다. 중년의 그는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저승사자는 안쓰러운 듯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넨 어쨌든 천수를 누리게 됐구만. 축하하네.”

“이보시오! 날 데려가 주시오!”     

김 감독은 다시금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예술가가 아닌 자신은 가치가 없다. 차라리 죽고싶다. 저승사자는 힐끗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살아남는 게 저주가 되는 경우도 있다니, 별일이군. 미안하지만 자넨 죽고 싶어도 때가 오기 전엔 죽지 못해.”      

....     

며칠 후, 포털사이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떴다. 이 기사는 문화 예술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김상신 감독, 황금바나나상 반납하고 산속으로 칩거. ‘더 이상 작품 않겠다’”

“김 감독 작업 여배우들, 성폭력 사실 연속 폭로...영화계 ‘패닉’”      

작가의 이전글 서니브룩의 레베카를 떠올리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