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발령은 가끔씩 유배처럼 찾아온다.
발령지를 보자마자, 바다 냄새가 나는 기분이었다. 교사의 발령은 가끔 유배처럼 불쑥 찾아온다. 준비도, 선택도 없이.
내가 사는 지역에는 임용 TO가 현저히 적었다. 한 명 내지 두 명을 뽑을까 말까 했다. 오래도록 사랑해 온 나의 고향을 뒤로하고 내가 임용을 응시한 곳은 어느 도지역이었다.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고, 따로 연고지가 없던 나는 그저 선발 인원에 혹하여 임용을 치게 되었다. 그렇게 임용 합격 후 생활 근거지를 기점으로 희망지를 3순위까지 적어냈다. 내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바닷가에 근접한 도시로 갈 것인가, 혹은 고향과 가까운 시골로 갈 것인가.
임용 결과 발표를 기다리며 나는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졌던 순간이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산을 오를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내가 고른 희망지는 바로 이곳이었다. 사실상 내가 지원한다고 해서 인기가 많은 도시로 갈 확률이 현저히 낮을뿐더러 어차피 신규 발령 교사의 무덤에 묻힌다면, 내 발로 가는 것이 그나마 나았다. 또 하나의 현실적인 이유는 바로 집값이었다. 임용 합격과 동시에 가장 아닌 가장이 된 내게 금전적인 이유는 꽤 컸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비릿한 바다가 아름다운 유배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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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쓴 자전 소설에서 나는 엄마와 나의 관계를 묘사할 때 이 같은 표현을 썼었다. 엄마의 죽음을 먹고 태어난 아이. 무슨 해리포터도 아니고 우스운 표현이 아닐 수 없으나, 절반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우리 엄마는 마흔다섯에 나를 낳았다. 당시에는 꽤나 충격적인 출산이었다. 산모는 출산 직전에도 흡연을 했고, 아이는 2.4Kg의 작은 몸집이었다. 결혼연령이 지금보다 한참 일렀던 그 당시, 엄마의 친구들은 일찍 낳아 키운 아이를 독립시키고 이제 노후를 맞이할 나이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엄마의 노후를 잡아먹을 것을 무섭게 예고하며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늘 나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다른 엄마들을 좇기 바빴다. 운전이 그중 하나였다.
내가 임용에 합격한 당시 우리 엄마의 나이는 예순아홉이었다. 칠순을 한 해 앞둔 그 나이에 우리 엄마는 그 작은 손으로 핸들을 움켜쥐며 평생 올라본 적 없던 고속도로에 올랐다. 유배지 아니 발령지는 산으로 둘러싸인 내 고향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만큼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세상에는 바다를 업으로 살아가는 삶도 있다는 것을 그제야 두 눈으로 실감했다. 늘어선 횟집과 양식장, 멀리 보이는 조선소의 모습까지 그곳은 생의 현장 그 자체였다.
인생에서 겨우 교사가 되었다는 것 하나를 업적으로 둔 내가 짙고 깊은 바다에 압도되는 순간이었다. 최인훈의 <광장>에 나온 첫 문장의 묘사가 떠올랐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그렇게 나는 내 삶의 지평이 내 눈에 아른거리는 수평선만큼 넓어지는 것을 목격하며 유배지에 첫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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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차에서 내려 향한 곳은 부동산이었다. 2월 중순에 발령을 받고, 3월 초에 바로 근무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집을 급하게 구해야 했다. 당시는 이사철이었기에 매물은 많았다. 그리고 그곳은 확실히 남쪽 끝 바다 마을이라는 이유에선지 월세가 내 고향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그렇게 나는 브랜드 아파트를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으로 구해서 들어갔다.
집값을 따지면서 굳이 아파트를 들어간 이유는 오직 하나, 엄마였다. 여러 이유로 아버지와 떨어져 지낸 지 몇 년이 된 상황에서 이제 내가 가장 아닌 가장이었다. 집 계약도, 생활비도, 온갖 법적 사회적 문제도 내가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모시고 1000에 40짜리 아파트를 계약했다.
부동산 투기를 좋아했던 아빠 덕분에 아파트는 돈이 안된다는 이상한 명분으로 늘 월세를 살며 이사를 다녔다. 2년에 한 번 있는 행사가 나에게는 아주 익숙하고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어쨌든 나는 취업에 성공했고, 저렴한 집값으로 브랜드 아파트에 살아보는 경험을 하는 거니까. 그 순간만큼은 바다의 비릿한 향이 꽤나 달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두 번째 행선지인 발령교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