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특이라는 이름의 노동
요즈음 유튜브에서 '좋은 세특', '잘 쓰인 세특'에 대해 논하며 조회수를 늘리곤 한다. 실제로 생기부의 시작이 창체 활동이라면, 생기부의 꽃은 세특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특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에 교사에게는 가장 번거롭고, 가장 오래 붙잡고 있어야 하는 기록이다. '한 학기 동안 아이를 마주했는데 1500바이트, 500자도 못써요?'라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다만 생각할 뿐이다. 이 글은 단순한 내 관찰 일기가 아니라, 대입 전형을 위해 생성될 자료이기 때문이라고.
세특은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일보다 오래 걸리고, 수행평가를 설계하는 일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한 한기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그 수십 차시의 수업과 수백 장의 수행평가지를 정리하며 비로소 시작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줄을 쓰기 위해 한 시간의 수업을 다시 떠올리고, 그 시간에 오갔던 질문과 표정, 망설임까지 끌어와야 한다. 세특은 교실과 가장 가까운 기록이지만, 교사에게는 가장 멀리서 천천히 다가와야 하는 작업이다.
여기에 진로라는 조건이 더해지면 세특은 한층 더 어려워진다. 수업은 교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세특은 진로 중심으로 읽힌다. 이 수업에서 배운 개념이 왜 그 진로와 연결되는지, 이 활동이 어떤 계열의 적합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교사는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그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을 때도 있다. 교과의 본질보다 진로의 언어가 먼저 떠오르는 순간, 수업은 기록을 위한 재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수업이 아이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보다, 이 문장이 어디에 쓰일지가 먼저 계산된다.
사실 세특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을 혼자 쓰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교과 수업을 여러 교사가 나누어 맡는 경우가 많다. 한 교과를 심지어는 5명이 나누어 맡기도 한다. 같은 학생을 두고도 교사마다 바라본 장면은 다르고, 기억하는 순간은 다르다. 어떤 교사는 토론 시간의 발언을 떠올리고, 어떤 교사는 과제 제출의 성실함을 떠올린다. 세특은 그렇게 여러 교사의 조각난 관찰 위에 세워진다.
그래서 세특은 협업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 협업은 늘 매끄럽지 않다. 실제로 나는 세특을 두고 동료 교사와 갈등을 겪은 적이 있다. 세 명이 나누어 들어가는 수업이었는데, 학기 말이 되자 한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수행평가 준비하느라 너무 힘들었어. 세특은 안 쓸게.” 그 말은 부탁이 아니라 선언에 가까웠다. 그 순간, 세특은 더 이상 공동의 기록이 아니라 누군가의 몫으로 미뤄진 노동이 되었다.
수행평가를 준비한 수고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세특은 수행평가의 대가처럼 선택적으로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빠지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은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같은 수업을 했고, 같은 학생을 가르쳤지만 기록의 책임은 고르게 나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세특을 협업의 산물이라고 말할 때마다, 그 말 뒤에 숨은 불균형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다.
그 갈등은 크게 표면화되지 않았다.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결국 남은 사람들이 더 써서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배웠다. 세특의 어려움은 문장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노동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을. 그리고 그 문제는 매 학기 반복된다는 것도.
결국 생기부는 더 이상 교육의 기록이라기보다, 대입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문장이 교실의 모든 장면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 기록이 아이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교육과 입시 사이에서 가장 덜 아픈 표현을 고르고 다듬으며 생기부는 그렇게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