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은 법정이 되었다.
수능이 끝난 뒤의 교실은 늘 애매한 공간이 된다. 이동수업을 하지 않고, 반에 남아 선택과목 교사들이 임장지도를 하던 시기였다. 그날의 주인공이 된 아이는 우리 반에서 꽤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장난기가 많고 말재주도 좋아서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자주 맡았지만, 선을 넘는 법은 없었다. 예의가 몸에 밴 아이였고, 다른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그래서 그날도 나는 별다른 긴장을 하지 않았다.
어느 선생님께서 우리 반 임장지도를 맡은 시간이었다. 출석을 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손을 들었다고 했다.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겠냐는 말이었다. 흔한 요청이었고, 선생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10분이 지나도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수능 이후의 시간은 느슨했고, 교실 안의 공기도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자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닐지, 다른 곳에 간 건 아닐지. 결국 선생님께서는 아이를 찾으러 교실을 나섰다. 그것이 갈등의 시작이 될 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선생님께서는 복도와 화장실을 오가며 아이를 찾았고, 마주친 순간 짧은 말이 오갔다. 정확히 어떤 말이 먼저였는지, 어떤 표정이 더 날카로웠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짧은 대화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교사는 지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아이는 감시받고 있다고 느꼈다. 몇 마디 대화 끝에 그들은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나는 이 일이 교권보호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다소 심각한 목소리로 담임인 나를 부르셨다. 방금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아이가 화장실에 다녀온 뒤 지도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가 속상해 보였다고 했다. 말투가 달라졌고, 표정이 굳어 있었으며 분명히 감정이 상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 큰 문제처럼 들리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이미 피로와 불쾌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에요.”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이의 태도에는 사과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지금 이 상태로 두면 교사의 권위가 가볍게 여겨질 수 있다는 우려도 덧붙였다. 그래서 아이에게 전해달라고 말씀하셨다. 5교시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줄 테니 반성문을 써 오라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교권보호위원회에 올리겠다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아이의 행동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 지도가 어떤 어조와 표정으로 이루어졌는지, 아이가 느낀 속상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그 자리에 없었던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아이가 평소 예의 없는 학생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장난은 많았지만, 선을 넘는 법은 없었고 오히려 교사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아이였다. 반성문이라는 형식이 과연 그 아이의 감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반성문은 대개 잘못을 인정하는 문서지만, 아이가 느낀 감정은 잘못이라기보다 상처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수시 원서 6개를 모두 불합격한 상태였고, 주말이었던 전날 가족들과 위로 겸 식사를 한 후 배탈이 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씀을 드린 것인데,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걱정하신 선생님께서 찾으러 간 것이었다. 아이는 15분 정도 화장실에 갈 수 있지 않냐는 입장이었고, 선생님께서는 걱정돼서 부른 건데 그렇게 반응하니 속상하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모두의 입장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5교시라는 시간제한과 교권보호위원회라는 단어는 아이에게는 위협적으로 들렸을 수 있다.
아이는 억울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무단으로 자리를 이탈한 것도 아니고, 출석을 부른 뒤 분명히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씀을 드린 후 허락을 받고 나간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교권보호위원회까지 언급될 사안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아이의 말투에는 반항보다는 혼란이 묻어 있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한 발 물러서 있었다.
“담임 선생님 입장이 불편해진다면 반성문을 쓰겠습니다.”
아이의 말은 계산된 타협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을 더 키우고 싶지 않다는 조심스러움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서 아이의 진심이 드러났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일방적인 사죄가 아니라 대화라는 것이었다. 잘못을 인정하기 전에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서로의 입장을 말해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반성문을 쓰게 하는 일이 과연 이 아이에게 무엇을 남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억울함을 삼킨 채 쓰는 사과가 관계를 회복시키는지, 아니면 침묵하는 법만 가르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사죄를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충분히 생각해 보고, 네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을 스스로 정하라고 말했다. 반성문을 쓸지 말지는 네 몫이지만, 그 선택의 책임 역시 네가 감당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날 나는 분명 중재자였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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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반성문을 쓰지 않은 아이를 대신해 내가 선생님을 찾아갔다. 아이의 상황과 마음을 설명하며 사죄를 전했다. 그때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 사안은 교권보호위원회에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녹음기를 켜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이 일이 더 이상 학생 지도나 대화의 문제가 아니라 기록과 판단의 문제로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교실에서 시작된 사소한 갈등이 어디까지 흘러가게 될지 가늠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