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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준희 Aug 05. 2020

7. 제멋대로인 재벌과의 만남

<데이팅 프로젝트> 매거진은 건어물녀였던 제가 적극적으로 연애하기 위해 노력했던 3개월 동안 만난 사람들과 느낀 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데이팅 프로젝트 중 만난 사람 중 가장 흥미로웠던 사람은 필립이라는 사람이었다.



필립과의  만남


내 친구 중에는 고급 취향을 가진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는 Nello라고 하는 맛과 분위기는 평범하지만 가격이 정말 터무니없이 비싼 레스토랑을 즐겨갔다. 하루는 뉴욕에 놀러 와서 쇼핑을 마치고 홀로 식사하고 있던 친구를 만나러 Nello에 갔는데, 친구가 기분이 좋은 상태로 옆 테이블의 두 명의 남자들과 이야기 중이었다. 친구 앞에는 남자들이 사준 와인잔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친구는 술을 정말 잘 마신다.) 


남자들 중 한 명은 50대, 한 명은 20대였는데 50대 남자는 자신을 골드만 삭스의 이사로 소개했다. 20대 남자의 정체는 알 수 없었는데 50대 남자가 20대 남자의 사업을 도와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중 20대 남자가 필립이었다. 필립은 나를 마음에 들어해서 친구가 내가 좋아하는 술이 샴페인이라고 하자 바로 50만 원 상당의 샴페인을 시켰다. 나는 잘 모르는 사람들과 취하고 싶지 않아서 술은 안 마셨지만 필립과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그 이후 4~5년 동안 필립과의 인연을 이었다.



베일에 싸인 남자


필립은 스위스, 런던, 뉴욕을 오가면서 가업인 금융 사업 (유럽 중앙은행 관련이라고 했던 것 같다)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무얼 연구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니고 있던 콜럼비아 대학교에도 드나들면서 교수진과 일하기도 했다. 그에 대해 뭔가를 물어보면 항상 주위를 둘러보며 개인 적인 일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워낙 비밀이 많으니 그가 허언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절대로 내가 만나고 싶은 장소에는 가지 않고 자신이 가고 싶은 장소에서만 만났고, 독어를 유창하게 했고, 학생증이 없으면 출입할 수 없는 학교에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일들도 종종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이 필립이라는 것만 알 뿐 성이 뭔지도 모른다.


그는 매우 부유해 보였다. 뉴욕 안에서도 고급스러운 장소에만 드나들었고 (보통 호텔 바였다), 웨스트 빌리지와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2채의 집을 왕래하며 생활했고, 항상 택시를 타고 다녔지만  열쇠 꾸러미에는 벤틀리 차키가 있었다. 그와 제인 호텔 클럽에 갔을 때 그는 제인 호텔이 자기 소유라고 하기도 했다. 워낙 허언증 환자 스러운 사람이라 정말로 그의 소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호텔 스태프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하긴 했다. 그는 나에게 연봉 2배와 보너스를 제안하며 일자리를 주겠다고 한 적도 있다. 그때 나는 이미 취직해 있었고 그를 상사로 두고 일하다가는 여러 정신질환에 걸릴 것 같아서 거절했다.


화려한(?) 겉과 달리 그의 성격은 정말 유치하고 제멋대로 였다. 나보다 5살이나 많은데도 정말 철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의 순수함과 하찮은 귀여움이 있어서 같이 노는 재미가 있었다. 그는 술을 많이 마시는 법이 없었고 단 한번도 취한걸 본적 없지만, 만날 때 마다 10시쯤부터 집에 가려고 하는 나한테 무한반복으로  ‘한잔만 더 마시자’를 외쳤다. 


어느날은 ‘한잔만 더’에 낚여서 새벽 3시까지 취하지도 않은 상태로 끌려 다니며 술 한잔을 몇시간 동안 붙들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호텔 바들은 대체로 새벽 2~3시쯤엔 닫는다. 그는 바가 닫아도 내가 끌고 나갈 때까지 절대로 제 발로 나가지 않았고, 바텐더가 영업이 끝나서 더 이상 술을 안 판다고 해도 절대 듣지 않고 바텐더를 못살게 굴며 기어이 팔게 했다.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의 루프탑바가 프라이빗 이벤트로 닫았을 때도 관계자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문지기를 못살게 굴며 매니저와 만나게 해 달라고, 자길 보면 들여보내 줄 거라고 조르기도 했다. (결국 내가 끌고 나왔다.) 이렇게 막무가내였지만 워낙 신선한 그의 제멋대로인 행동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고 그와 함께일 때는 나도 제멋대로 굴 수 있어서 좋았다. 


필립을 만날 때는 워낙 상식 밖의 행동들을 해서 휘둘리지 않으려면 나도 적반하장으로 굴 수밖에 없었다. 약속시간에 늦은 그를 두고 말도 없이 집에 가버리는 등 평소 타인에게 하는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필립은 꼴 보기 싫은 행동을 하다가도 내가 화내면 쩔쩔맸다. 그와 있을 때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와의 만남 중 현재의 사업 파트너를 만나다


필립에게 가장 고마운(?)건 현재 나와 함께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는 사업 파트너 찰리를 필립과의 만남 도중에 만났다. 어느날 당일에 연락와서 그날 밥을 먹자고 땡깡을 부리는 필립을 따라 (나는 당일 약속을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점에 갔는데 내가 심드렁하게 구니 하나도 재미없다면서 옆자리에서 혼자 식사하고 있던 여자와 대신 식사할 거라고 깐족 거리며 그 여자에게 가서 말을 거는 것이었다.


나의 관심을 끌려고 그런다는걸 알아서 '에휴 쟤 또 시작이다'라고 생각하던 중 필립과 나를 지켜보던 내 옆자리의 남자가 필립 같은 남자와 식사하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게 찰리였다. 찰리는 근처에서 일해서 일이 끝나면 그 레스토랑에서 자주 식사를 한다고 했고, 직장에 다니며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엔 내가 아직 학생이었지만 부동산에 관심이 많아서 부동산을 화두로 금방 찰리와 친해졌다. 나와 찰리가 대화하는 걸 보고 필립이 다시 쫄래쫄래 달려와서 훼방을 놓으려고 했지만 찰리와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락처를 교환했고 종종 부동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부동산 투자를 시작한 2년여 후부터 사업 파트너가 됐다. 지금 찰리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됐다. 데이팅 프로젝트는 나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시기였던 것 같다.






필립과 나는 사귀는 것도 아니었고, 스킨십도 없었고,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연결고리도 없었고 한마디로 만날 이유가 전혀 없지만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정을 가지고 만나는 친구가 있다는 게 꽤 신선하게 느껴져서 몇 년을 만나왔다. 그와 있을때는 나도 예의를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굴 수 있는 자유로움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 남자 친구가 생긴 후 평소의 짜증을 유발하는 유치함과 더불어 만날 때마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라는 둥 꾸준히 선을 넘고 비아냥 거림이 너무 심해져서 그의 전화번호를 수신 거부하고 지워버렸는데 연결고리가 없으니 이젠 더 이상 연락할 길이 없어졌다. 그래도 나는 마음속으론 필립이 아무쪼록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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