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 그 순수한 낭만
이유 없는 불안감을 느끼던 어느 날에 생각 없이 읽고 싶어서 <아무튼, 문구>를 집어 들었는데 뜻밖에도 너무 좋은 작품을 만났다. 저자 김규림 씨는 문구광이다. 펜, 종이, 스티커 등 문구를 사모으고, 해외여행을 가서도 문구점에 꼭 들러서 둘러보며 탄생/출판된 <뉴욕규림일기>와 <도쿄규림일기>도 있다. 아무튼, <아무튼, 문구>는 문구에 대한 책이 아니다. 낭만이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는 책이고, 열정에 대한 책이고, 개인의 다양성에 대한 책이라고 느꼈다.
덕질, 그 순수한 낭만
자신이 사랑하는 문구에 대해 빼곡히 써 내려간 열정적인 글에서 낭만을 느꼈다. 자신이 즐기는 것들을 마음껏 즐기며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비효율 적인 것들에 대한 예찬이 인상 깊었다.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대부분 비효율적인 시간들에 있다. 빨리 할 수 있는데도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한 것들. 이를테면 전화로 할 말을 느릿느릿 손편지로 쓴다든지, 파워포인트 기본기능으로 빨리 만들 수 있는 자료를 굳이 손으로 그리고 써서 만든다든지 하는 것들."
"나는 굳이 수고를 들이는 일들을 좋아한다. 칼로 연필을 깎고, 매일 시계의 태엽을 감고, 일력을 뜯고, 전기포트를 놔두고 가스레인지에 물을 끓인다. 이런 비효율성을 감내하는 건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걸 뜻한다. 그래서 나는 내 일상 속에 항상 쓸데없는 일들이 조금씩 자리하고 있기를 바란다. 빠르게 움직이는 일상 속에 수고로운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다는 건 잘 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기에."
한 푼도 실용적이지 않은 것에 쓰려고 하면 망설여지는 나에겐 참 신선했다. 그리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참 순수한 소비 예찬을 읽으니 행복을 위해 나도 좀 풀어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쓸데없는 것들의 힘을 믿는다. 생필품들은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지만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쓸모없는 물건들이다 ... 나도 더이상 핑계 대지 않으려 한다. 예뻐서, 귀여워서, 써보고 싶어서, 그냥 사고 싶어서, 저걸 사면 오늘 하루가 더 나아질 것 같아서. 문구를 사고 싶은 이유는 실용적이라는 이유 말고도 너무나 많으니, 우리는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또한, 문구가 행동을 도와준다는데 공감했다.
"문방구의 힘이 참으로 신묘한 것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거다. 어떤 문구는 당장 행동하게 하고, 또 어떤 문구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게 한다. 만년필을 새로 산 날엔 끊임없이 글씨 연습을 하거나 글을 쓰고, 데일리 체크리스트를 사면 아침마다 꼬박꼬박 할 일을 정리해보게 되는 식이다. 즉각적으로 새로운 활동을 하게 하거나 전에 없던 습관을 들일 수 있게 돕는 이른바 '행동하는 문방구'"
"사실 나의 본성은 무척 게으르지만 행동하는 문구들이 어느 정도 커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체크리스트의 할 일들을 하나둘 지워가고 다이어리의 빈칸들을 하나씩 채우며, 나는 아주 조금씩 더 성실한 사람이 되어간다."
심지어 작가 김규림 씨는 문구가 좋아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책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사람이 됐다고 한다. 한 사람의 순수한 취미생활이 삶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문구 소비에는 언제나 좋은 기운과 아이디어가 함께 따라온다고 믿는다.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문구를 사서 써봄으로써 돌파구 혹은 해결책을 얻은 적이 많다. 좋은 아이템이 장착되면 잘 싸우는 게임 캐릭터처럼 새 문구를 살 때마다 일주일치 에너지가 솟아나기도 하고, 열정이 끓어올라 새 취미를 만들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사인펜을 발견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예쁜 노트를 매일 가지고 다니려고 일기를 써왔다. 그러니까 문방구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불씨가 되기도 하고, 작업의 훌륭한 조력자가 되기도 하고, 취향을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 학창 시절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면서 생각하는 시간이 또래 친구들보다 많았던 것도, 숨 막히는 학창 시절에 조금은 숨 돌리며 취미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문구 덕분이다. 나는 생각보다 작은 문구들에게 훨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모른다."
몇 달 전 워낙 정리정돈이 철저하고 문구에 대해 (사실 모든 것에) 까다로운 남편에게 등 떠밀려서 첫 잉크펜을 사게 됐다. 그걸 가지고 역시 남편이 사 온 몰스킨 노트에 글씨를 적으니 글씨가 균일하게 미끄러져 내려가는 희열을 느꼈다. 아마도 내 손으로는 절대 사지 않았을 만원이 넘는 노트와 2만 원이 넘는 펜을 한번 사용해 보고 나서 손글씨와 문구류의 기쁨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나도 문구의 매력에 빠졌다. 거의 매일 노트에 글을 적거나, 리스트를 적거나, 계획을 적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록들은 내 삶을 한 층 풍요롭게 해 주고 있다. 해야 할 일들을 잊어버리지 않게 해 주고 머릿속을 정돈해 주고, 한 일들을 적으면서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기쁨을 느끼게 해 준다.
<아무튼, 문구>는 직업도, 취미도 비효율을 최대한 줄이는 일을 하고, 거기에 너무나 적합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굳이' 필요 없는 무언가가 주는 대단함을 울려주었다. 우리 모두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할 권리가 있다. 나도 효율적이지 않고 필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내 인생 위에 뿌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