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한자녀 정책
중국의 한 자녀 정책
중국의 한 자녀 정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중국 당에서 인구를 줄이기 위해 한 자녀 정책을 시행했고, 두 번째 아이를 가진 경우 (혹은 쌍둥이일 경우) 강제로 중절을 하고 여자를 불임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는 내용이었다. 중국의 한자녀 정책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은 하지 않겠다.
다큐멘터리의 내레이터 난푸는 중국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남자로 태어나라는 의미로 난푸라는 남자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여자아이로 태어났다. 당시 시골 지역에서는 자녀를 최대 2명까지도 허용해서 그녀의 부모님은 법이 정한 5년을 기다려서 다시 아이를 낳았고 다행이 남자아이였다. 사실 난푸를 낳고 나서 그녀의 어머니는 당에 의해 강제 불임수술을 받을 뻔했지만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하나만 더 낳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도망 다녔다고 한다. 난푸는 자라면서 좋은 것은 모두 남동생에게 양보했고, 남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의무교육이 끝나자마자 일을 시작해야 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남동생이 말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나는 바구니에 담겨서 버려졌겠지."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는 단지 자신이 남성이었기 때문이지, 자신에게도 선택지는 없었다는 뜻.)
득남하기 위해 남자아이가 나올 때까지 여자 아이들을 낳아서 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사촌들 중 여자아이로 태어난 2명은 난푸만큼 운이 좋지 않았다. 아이를 하나만 낳을 수 있다면 모두가 남자아이를 낳고 싶어 해서 여자 아이가 태어났을 때 버렸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버려진 여자 아기들이 너무 많아서 시장에 가면 언제나 바구니나 상자에 담긴 아기들이 여럿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의 사촌 중 하나는 태어나자마자 바구니에 담겨 시장에 버려졌는데 이틀 동안 얼굴이 태양빛에 익고 모기에 물리도록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고 결국 죽고 말았다. 다른 사촌은 태어나자마자 아기를 거래하는 중개인들 손에 넘겨졌고 어떻게 됐는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고의 시나리오는 해외 입양, 최악의 시나리오는 중국에는 태어나지 않은 태아나 갓 태어난 아기를 달여 먹으면 젊어진다는 설 때문에 그걸 먹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내레이터는 집안 어른들에게 물었다. "내 아들과 내 남동생의 아들이 할아버지에게 같은 존재인가요?" 할아버지는 답하셨다. "당연히 아니지. 너는 결혼하면 남의 집안사람이고, 네 동생의 아들은 우리 집의 대를 이을 사람이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왜 아들이 있어야 하나요?" 할아버지가 답답하다는 듯이 화를 내며 답하셨다. "그거야 당연히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지!" "아기들을 버리면서 우리도 마음이 좋지 않았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 대를 이어야 하니까 아들은 있어야 하고."
! 그게 나였다.
그때까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던 내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내가 내 집안 어른들에게 글자 그대로 들었던 말이다. 내 엄마는 첫 아이로 남자아이를 낳았지만 아마 오빠가 남자가 아니었다면 남자를 낳을 때까지 낳았을 것이다. 그건 확실하다. 우리 엄마는 첫 아이를 남자로 낳기 위해 <아들 낳는 법>에 대한 책도 읽었다고 한다. 교육을 받지 못한 것도, 생물학을 알지 못한 것도 아니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했었던 거다. 집안 분위기가 그랬다.
내가 태어나던 시절 한국에서도 여자 아이를 낙태하는 일이 잦았고, 아주 최근까지도 같은 이유로 남자아이들이 여자 아이들보다 더 많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오히려 중국에선 한 자녀 정책을 실행하고 나서 여권이 많이 높아졌다. 지금 중국은 여권이 아주 높은 나라 중 하나다. 그리고 한 자녀 정책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남자아이만을 원하는 다자녀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가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너는 결혼하면 우리 식구가 아니잖아
내가 기억이란 걸 가지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나는 차별을 받은 기억들이 형성돼 있다. 특히 할머니 같은 어른들은 나를 예뻐하지 않으셨고 (내가 태어났을 때 여자아이란 걸 알고 실망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오빠와 같은 행동을 해도 나만 못마땅하다는 눈빛과 함께 혼났다. 아빠는 어린 나에게 여자는 시집가면 우리 집안사람이 아니라서, 그리고 오빠의 자식은 우리 식구이지만 내 자식은 우리 식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나는 오빠만큼 중요할 수 없다고, 내 아이는 오빠의 아이만큼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출가외인' 이라는 꽤 어려운 말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결혼하면 남의 식구이기 때문에 재산도 상속하지 않을 것이며 여자는 결혼하는 남자의 삶을 따라가는 거라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려면 결혼을 잘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내가 선택해서 여자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받는 차별이 억울해서 남자 그게 뭐 별거라고, 나도 남자다울 수 있단 걸 보여주기 위해 남자아이같이 행동했고 남자 같은 옷만 입었다. (여성스럽지 못해서 오히려 더 혼났지만.) 지금은 외형은 여자로 바뀌었지만 취미, 행동, 취향이 모두 여전히 꽤나 남성스러운 여성 어른으로 자랐다. 방어기제로 여성스러운건 아직까지도 고질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내 모습이 씁쓸하다.
나는 아빠를 미워하지 않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지만
사실 아빠는 나를 여지없이 사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성차별에 대한 부분도 많이 변했다. 내가 여자로서 아빠가 생각하는 남자의 일을 잘 해내고, 잘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사는 걸 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는지 이제는 예전에 했던 말들을 겸연쩍어하고 후회하는 것 같아 보일 때가 많다. 나는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아빠가 제안한 결혼을 잘하는 방법 대신 내가 두배로 더 열심히 하는 쪽을 택했다. 남자에게 인생을 맡겼다가 잘못되는 리스크를 감당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발전시키는 편이 더 확실한 미래를 보장한다고 아주 어린 나이에 판단했다. (그리고 뭐, 인기도 없었다.) 나는 기댈 곳이 없단걸 알아서 정말 절박했다. 지금도 벌만큼 벌어도 주윗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돈을 아끼고, 직업 외에도 부업을 하고, 투자에 준 전문가가 된 것도 전부 그 나는 혼자라는 절박함이 아직도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차별이 나에게 동기부여로 작용한 셈이다.
아빠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을 때 나를 보고 실망하고 돌아간 할머니가 두 딸을 낳고 겨우 얻은 장남으로써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큰 자랑이자 무게로, 아이덴티티로 여기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아빠가 그런 말과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이해 못할 부분도 아니다. 그리고 아빠 또한 가족을 넘어 집안을 어깨에 지고 있는 무게와 그 때문에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등 많은 희생을 했을테다. 성차별의 피해자는 여성뿐만이 아니라 남성들도 해당된다는 걸 난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아빠를 용서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은 없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잔인한 말들이 남긴 상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그 기억을 상기시키는 일이 있을 때마다 아직도 아린다.
중국에서 여자 아이를 바구니에 넣어서 버렸던 사람들이나 내 가족들이나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내가 한국이 아니라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바구니에 담겨서 버려졌을 아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버려졌을 때는 아픈 마음으로 버려졌겠지만 어찌 됐건 땡볓에서 연약한 얼굴 살갗이 익고 얼굴에 모기가 물려도 아무도 보살펴 주지 않고 바구니 안에서 소변과 대변을 보며 죽어갔을 아이라는 것을. 내가 엄마한테 내가 본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엄마는 말했다. "그때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리고 그 말은 그 다큐멘터리에 나온 내레이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한 말이었다.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어쩔 수 없다'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추구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