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확인 & 입덧
월경이 조금 늦어지나 보다 했더니 마치 전날 이성을 잃고 3차까지 폭탄주를 마신 것 같은 극심한 숙취 증상에 공복에 구토까지 하고 나서 임신 테스트기 3개에 줄줄이 양성이 나왔다. 그 후 2주, 지옥 같은 입덧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이후로 일부러 바쁘게 지내려고 세워두었던 루틴도 하나도 하지 못하고 있고, 평소 생활화된 독서도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읽는 것 같이 울렁거려서 못하고 있고, 그야말로 멀미를 24시간 하는 것 같은 상태라 소파와 침대에 번갈아 가면서 누워서 무언갈 억지로 먹고, 구토하고, 잠자고를 반복하고 있다.
류서방이 고생하네
그러다 보니 남편이 할 일이 많아졌다. 평소에 점심은 내가 간단히 준비했었는데 이제는 음식 냄새를 못 맡는 건 물론이고 일어나 있는 것도 힘들어서 남편이 세 끼를 챙겨주고 모든 집안일을 전담한다. 무뚝뚝한 남편답게 살갑게 내 고통을 동정해 주진 못하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군말 없이 해준다.
우리의 상황을 전해 듣고 내 부모님은 나와 남편을 매우 걱정하시며 엄마가 미국에 와서 임신한 내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은 입덧 중이라 엄마가 오셔서 음식을 해 주셔도 소용이 없고, 코로나 때문에 음식점까지 다 닫아서 엄마가 미국에서 가실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안전한 한국에서 코로나가 횡행한 캘리포니아로 오시는 것도 걱정이 되어서 거절했다. 그랬더니 알았다고 하시면서도 나를 돌보느라 고생하는 류서방이 안쓰럽다며 남편을 위해 용돈을 부쳤다고 말씀하셨다.
네가 정중하게 거절해줘
"엄마 아빠가 나 임신해서 고생한다고 너한테 주시는 용돈 부치셨대"라고 남편에게 별 생각 없이 말했다. 그런데 남편이 아주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그건 아닌 것 같아. 네가 나 대신 정중하게 거절해줘." "왜?" "네가 우리 아이를 임신해서 내가 너를 돌봐야 하는 건 당연한 건데 너희 부모님한테 돈을 받는 건 너무 이상한 것 같아."
임신은 우리 일 이니까
남편의 말을 듣고 생각이 많아졌다. 은연중에 아이를 낳는 건 나와 남편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부모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임신했다는 이야기 다음에 바로 오는 질문이 종종 "부모님 좋아하시지?" 이기도 하다. 이런 가족 단위의 생각이 너무 뿌리 깊어서 임신을 하거나 출산을 하고 용돈을 받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시부모님은 용돈을 주신 적이 없으시다
용돈을 받고 싶은 건 절대 아니지만 임신 용돈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남편이 신기해서, 시부모님께서는 우리가 임신했다고 용돈 주시겠다는 말씀 없으셨냐고 물었다. 전혀 말씀도 생각도 없으실 거라고 한다.
남편 부모님은 여유가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생각해 보면 남편과 내가 만난 5년 내내 남편을 금전적으로 도와주신 적이 한 번도 없다. 남편은 대학생 때도 학비는 도움을 받았지만 학자금 대출도 받았고 생활비는 벌어서 썼다고 한다. 사업을 시작해서 소득이 거의 없을 때도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대학 졸업 후부터 20대 중반까지 저축해둔 돈을 밑천 삼아 바닥날 때까지 한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우리가 혼인 신고를 했을 때도 나는 가족들에게 용돈을 받았고 시부모님은 축하 꽃을 보내 주셨다. 사실 우리는 각자 자취하다 합친 형태의 동거를 하다가 혼인신고만 한 거라 금전적 도움이 전혀 필요 없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사뭇 오빠 부부가 결혼할 때 양가 부모님께서 결혼식 비용과 신혼집과 살림살이를 모두 마련해 주신걸 생각하면 줄 생각도, 받을 생각도 없는 남편 가족은 내 가족의 환경과 문화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도움을 받지 않는 대신 독립적이고 자유롭다
남편은 독립적이고 책임감 있고 철두철미하다. 어떤 상황에도 불평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고 해답을 찾는데만 몰두한다. 나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존경했기 때문에 남편에게 소득이 없을 때도 남편을 믿을 수 있었고 걱정하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남편을 선택했다.
남편을 반대하는 부모님과 수년간 싸우고 부딪쳐야 했던 나완 달리 남편은 한 번도 나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부모님의 허락을 구한 적이 없다. '내가 너랑 결혼한다는데 왜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해? 부모님이 널 싫어할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난 전혀 상관없어'라는 식이었다. 시부모님께서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선 넘는 법이 한번도 없이 존중해 주신다.
남편은 도움을 받지 않는 대신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고 기댈 곳이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최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나 또한 남편과 함께 이제는 그렇게 살고 있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에 아주 만족한다. 나의 아이를 키울때 남편의 부모님처럼 키워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