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by 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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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시험일 아침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평범한 대한민국 학생의 인생에서 맞이하게 되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들 중 하나였을 테니까. 희한하리만큼 수능한파는 매년 정확히 돌아오는 것이어서 나의 그 날도 어김없이 추웠다. 안그래도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는 여러모로 힘겨운 날이었던 것이다. 무엇이라도 빈 속에 집어넣고 가야한다는 의무감에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아침을 대충 삼키고 아빠와 함께 집을 나서던 새벽. 엄마는 내가 시험을 치는 내내 절의 불상 앞에서 무사한 시험을 기원하며 하염없이 절을 하고 계실 터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매 과목, 매 시간. 길고 길 것이라 생각했던 그 날의 하루는 생각보다 쏜살같이 흘러갔다. 이제 진짜 끝이라고? 믿기지 않을 때 즈음 시험의 마지막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고사장 안은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웅성였던 것 같다. 나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몽롱한 기분으로 생전 처음 와 보는 낯선 동네의 고사장 교문을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이젠 지긋지긋한 수험생활도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아주 큰 착각이었다는 걸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사실 더 큰 무지막지한 선택의 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요즘은 내가 수능을 치르던 그 시절에 비해 수능의 의미가 많이 달라지기도 했고, 그 무게도 덜 무거워진 것 같기는 하다. 반드시 대학을 진학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많이 변한데다, 대학을 진학하는 방식도 수시나 다양한 전형들이 생겨나 수능의 비중이 현저히 줄어든 편이기 때문이다. (사실 수능이라는 것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된 지 오래된지라 백프로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십대 청소년의 인생에서 처음 내 인생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선택의 순간이라는 의미에서 수능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순간이다.


하지만 그 시기를 통과하여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전히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다른 모양의 수능을 치르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여러 과목의 시험지를 하루 종일 풀어내야 하는 그런 시험은 아니지만, 삶의 여러 지점에서 나의 애간장을 녹이며 시험에 들게 하는 고뇌와 선택의 순간들이 불쑥 찾아온다. 늘 항상 최상의 컨디션에서 내가 아는 것만 나오는 시험지를 술술 풀어낼 수는 없다. 이미 알았던 것이라 해도 순간의 실수로 틀린 답을 고르기도 하고, 전혀 알지 못했던 문제였음에도 운 좋게 정답을 고르기도 하고. 절반은 맞추겠나 싶을만큼 어려운 문제가 사실은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도 한다.


모든 것을 운과 운명에 맡길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을 다 한 뒤에는 결과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책임지며 대처 해 나가는 것.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수능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 시절의 나는 이렇게 의젓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이 다 무너진 것처럼 엉엉 울었지만.


그러니, 오늘 수능을 치른 모든 분들이 일단은 가벼워지셨으면 좋겠다. 나의 손을 벗어난 것을 복기하여 괴로울 필요는 없다. 종일 수고한 나를 한 껏 기특해하고 대견해하면서 오늘 밤만은 걱정없이 푹 잠드시길. 내일은 내일의 해가 또 뜰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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