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부트

by 휴운

*

가끔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좋다.

휴대폰도, 마음도, 다 켜져만 있어서 뜨끈하게 달아오른 상태일 때—

그냥 전원을 꾹 눌러 끄듯, 나도 스스로를 잠시 꺼버리고 싶어진다.


사람도 기계처럼 리부트가 필요하다는 걸, 요즘 더 자주 느낀다.

그런데 리부트라고 해서 거창한 결심이나 새 인생 선언 같은 건 필요 없다.

컴퓨터가 재부팅할 때도 사실 ‘시스템 최적화 중…’ 이런 멋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잠깐 꺼졌다가 다시 켜질 뿐이다.

대단하지 않은 동작인데,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걸 다시 정리한다.


나에게 리부트는

책상 위를 슬쩍 정리하는 일,

미뤄둔 빨래를 돌리는 일,

아무 말 없는 친구에게 점 하나 찍힌 이모티콘을 보내보는 일.

이런 자잘한 동작들이다.

피곤한 마음 안에 공기 한 줌 들어오게 만드는 일들.


우리는 흔히 ‘다시 시작한다’는 말을 너무 무겁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리부트의 본질은 ‘초기화’가 아니라 ‘숨 돌림’에 가깝다.

꺼져 있던 화면이 다시 켜질 때, 바뀌는 건 아주 미세한 온기 정도지만

그 온기가 다음 문장을 쓰게 만든다.


오늘의 나는 그렇게 살짝 리부트된 상태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지만, 멀쩡히 다시 걸어갈 만큼의 여유는 생겼다.

아마 그 정도면,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한 재부팅이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잃어버린 것과 사라져버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