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보다 소비기한의 삶

by 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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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구석, 식품의 모서리마다 박힌 숫자들을 본다. 무심코 지나치다가도 한 번 눈길이 머물면 묘한 압박감을 주는 숫자. 바로 유통기한이다. 그동안 우리는 그 숫자가 지나가는 순간, 멀쩡한 음식을 '폐기 대상'으로 분류하며 서둘러 작별을 고해왔다.

하지만 최근 '소비기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우리 곁에 찾아왔다. 파는 이의 입장에서 그어진 선이 아니라, 먹는 이의 입장에서 허용된 실제적인 생명력의 기한. 이 작은 단어의 교체 덕분에 억울하게 버려질 뻔한 것들의 수명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았다.

이 변화를 문득 우리의 생 위로 가져와 본다. 우리 역시 사회가 암묵적으로 그어놓은 유통기한 속에서 스스로를 재촉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에너지가 충분하고 꿈의 색깔이 여전히 선명함에도, '정년'이나 '적령기'라는 이름의 구획 앞에 서면 마치 기한이 다한 상품처럼 움츠러들곤 한다.

인생에는 인쇄된 숫자처럼 정해진 기한이 없다. 삶은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이 아니기에, 각자가 품은 열정의 총량과 속도는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타인의 시선으로 그어진 '유통기한'에 나를 맞추기보다, 내 안의 생명력이 허락하는 '소비기한'을 믿어보기로 한다.

생의 수직선을 닫지 않고 활짝 열어두는 일. 내 삶의 마지막 페이지는 고정된 한 점이 아니라, 내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매일 조금씩 뒤로 밀려나는 유연한 지평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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