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성의 시간

by 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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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시간을 들인다'는 말이 사전 속의 말처럼 낯설다. 모든 분야에서 효율이 최고의 선이 된 시대, 부러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목적지 없는 길을 걷는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는 기술의 힘을 빌려 시간을 압축하고, 배속 버튼으로 삶을 요약한다. 하지만 그렇게 빠르게 해치워버린 일상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 무언가를 끝냈으나 손바닥엔 온기가 없고, 머릿속 잔상은 물기 없는 먼지처럼 흩어진다. 정작 중요한 순간을 복기하려 하면, 마치 처음 본 풍경 앞에 선 이방인처럼 막막해지곤 한다.

문득 김치를 담그던 풍경이 떠올랐다. 클릭 한 번이면 갓 담근 겉절이부터 시큼한 묵은지까지 취향대로 배달되는 세상이지만, 내 기억 속의 김장은 '기다림'이라는 재료가 반 이상을 차지하는 고된 의식이었다.

커다란 대야 속에서 소금에 절여진 배추가 서서히 제 빳빳한 고집을 꺾고 숨을 죽이는 시간. 양념과 배추가 낯선 통성명을 마치고 서로의 속살로 스며드는 시간. 그 기다림의 연속이 비로소 '맛'을 완성했다. 배추 잎 한 겹 한 겹에 양념을 바르는 것은 단순히 간을 맞추는 행위가 아니라,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로 배추와 양념을 꿰매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무심한 시간의 틈 사이로 마법은 일어난다. 평범한 채소에 불과했던 배추가 양념을 머금고, 다시 그 양념이 시간을 머금으며 마침내 발효라는 이름의 깊이를 얻는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숙성의 방'이 필요하다. 효율이라는 잣대로만 재단할 수 없는, 부러 돌아가는 길과 멍하니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 그 틈틈이 다채로운 삶의 맛을 품으며 깊어지는 과정이 없다면, 우리의 생은 얼마나 밋밋하고 삭막할 것인가. 때로는 가장 비효율적인 몰입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나'라는 맛을 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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