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에 바나나
J는 귀여운 남자 사람 친구이다. 국적은 홍콩, 굳이 나이를 따지면 나는 소위 말하는 ‘빠른 생일’이라 J가 한 살 더 많다. 홍콩 사람한테 “한국에서는 빠른 생일이란 게 있어서 우리는 사실 친구야. 내 친구들은 다 너랑 동갑이거든”이라고 굳이 설명을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나는 굳이 굳이 설명했다. 그래도 J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칭으로 ‘oppa’를 고집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로 한류를 접한 J는 원래 한국 여자들은 남자들을 때리냐며 내 주먹을 조심하면서도 종종 저런 소리를했다. ‘오빠’란 호칭도 한류 열풍인가 싶었다. 코로나로 벌써 한 3년은 못 만났으니, 다시 만나도 우리가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지 까먹었을지도 모르겠다.
J를 처음 만났던 건 대만에서였다. 당시 나는 태국에서 2년간 일을 하다가, 들어오는 길에 중국어를 배우겠다고 한 학기 대만에 들렀다. 원래 언어 공부를 좋아하는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 ‘2년 동안 타지에서 돈 버느라 고생 많았다. 한 학기 동안, 언어 공부랑 탱고만 배우다가 한국에 가자!’ 하고 말이다. 대만에 도착해서는 이미 태국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 스타벅스에 가서 ‘땡큐’나 ‘씨에씨에(감사합니다)’를 말하고 싶을 땐 자꾸 ‘커쿤카(태국어 고맙습니다)’가 먼저 튀어나와서 난감했지만, 그럼에도 생활 환경을 바꾸는 일은 늘 새롭고 설렌다.
물론 J는 홍콩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만에서 만날 일은 없는 친구였다. 하지만, 탱고판은 좁았다. 사실 우리나라 탱고 인구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 편이지만, 스윙이나 살사 등 다른 춤과 비교하면 수가 적은 편이다. 워낙 어려운 춤이라고 소문이 나있기도 하고, 춤의 정서도 신난다기보다는 한스럽다고 해야 할까. 아련하고 비애감이 넘치는 곡들이 많다. 그렇다보니 보편적이라기보다는 마니아층이 많은 춤인 것 같다. 아무튼, 워낙 인구가 적어서 아시아에서 춤을 좀 오래 춘 사람들은 서로 알음알음 얼굴을 알고 있을 정도로 판이 좁다.
J는 나의 태국 탱고 선생님 G의 친구였다. 그래서 내 친구가 되었다. 당시 J는 탱고를 배운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춤을 잘 춰서 꽤 유명했던 것도 같다. J와 G는 동갑이었지만, G는 J를 천재라고 하면서 늘 베이비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어느 날 G는 대만에서 토토로 전시회도 보고, 나도 만날 겸, 타이베이 탱고 페스티벌에 놀러 왔다. 그 행사에 J도 참가했고, 그렇게 우리 셋은 드넓은 대만의 한 콘서트홀에서 만났다. 행사장에는 홍콩, 한국, 유럽, 중국, 일본, 아르헨티나 등 다양한 국적의 땅게로스들이 모여 있었다.
타이베이 시내 한복판에 높은 빌딩 안에 있는 콘서트홀에서 진행된 행사는 화려하고 북적였다. 드레스 코드가 ‘엘레강스’였던 만큼 아름답고 우아한 사람들이 어깨를 펴고 새처럼 걸어다녔다. 나는 화려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왠지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끼며 구석에 숨어 있었다. 평소에도 귀퉁이가 편했던 나로서는 그게 마음이 편했다. 행사장의 공기처럼 스리슬쩍 앉아 있었다. 그때였나. J가 내게 다가와 춤 신청을 했다.
나랑 춤 출래? 왜 숨어 있어!
젠틀한 신사처럼 차려입고는, 호주의 귀여운 동물 쿼카처럼 웃었다. J는 행사장 뒤편에 숨어 있는 나를 무대로 끄집어내서는 춤을 췄다. 음악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긴장감과 걱정만 머리에 꽉 찼던 것 같다. 이게 나의 첫 해외 페스티벌에 대한 단상이다.
사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건 바로 춤을 다 추고 난 뒤 J의 표정이었다. 놀라움과 초조함, 당황스러움 같은 것들이 J의 눈동자에 가득했다. 그때는 탱고를 출 때, 두 손 맞잡고 몇 걸음 함께 걷다 보면 서로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사실을 몰랐다. J의 눈에 담긴 마음은 아마도 ‘나의 것’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친구인 J에게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걱정이 J에게도 모두 전해졌을 것이다. 거기에 뻣뻣하게 덜그럭거리는 몸이라니.
춤을 추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당시에 들었던 으스스한 괴담 중 하나가 춤을 못 추면 그 상대방과 다시는 춤을 출 수 없고,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춤을 망치고 나면 다시는 그에게 춤 신청을 받을 수 없다 뭐 이런 흉흉한 소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물론 괴담이었다. 걱정과는 다르게 J와 그의 친구들은 이후에도 폴짝폴짝 뛰어와 춤 신청을 했다.
나중에 한국에서 만났을 때에도 J와 친구들은 또래가 드문 탱고판에서 나를 살뜰히도 챙겼다. 애들은 한국에 탱고를 추러 자주 놀러왔는데, 그럴 때마다 같이 족발 골목에 가서 보쌈을 먹는다거나 그들의 숙소에 초대했다. 놀러가서 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한참을 탱고 연습을 했다. 탱고 이야기만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외에서 탱고를 배워서 한국에는 또래도, 동기 친구도 없던 나의 유일한 친구들이었다. 어쩌면 이 친구들이 내게는 짧은 탱고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뒤풀이를 가도 술 없이 계란말이에 케첩 찍어서 밥 먹는 귀여운 탱고 베이비들. 나의 탱고 유년기를 함께 해준 유일무이한 존재들. 탱고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공감하고, 서로를 응원했던 시간들. 우리의 춤도 언젠가 시간이 흘러 은은한 맛을 낼 거라며 힘을 내던 시간을 오래 오래 기억할 것이다.
J가 나를 놀리면 곁에서 늘 내 편을 들어주던 다정한 C가 있었는데, 그 둘이 곧 결혼한다고 한다. 나와 남편이 만나기 100일 전쯤 먼저 사귀기 시작한 둘은 알콩달콩 사귀다 얼마 전 J가 C에게 종이 반지를 주며 프러포즈를 했다고 한다. 청순한 외모와는 별개로 용감하고 사랑스러운 C. J를 귀엽게 쏘아보면서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당차게 Yes라 대답했을 C의 모습이 그려져 웃음이 난다.
대만에서 처음 J를 만났을 땐, 내가 탱고를 이렇게 오래 배우고, 그 안에서 결혼도 하고, 또 수많은 인연들을 쌓아 나갈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 탱고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성장을 응원하고, 공감했던 시간들. 앞으로도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곁에서 가벼운 농담으로, 진지한 고민으로 서로의 탱고를 응원하며 도란도란 오래도록 지낼 것이다.
2주 뒤에는 오랜만에 귀여운 예비 부부를 만나 이탈리아 남부의 소도시에서 탱고도 추고, 카프리 섬의 푸른 동굴에도 가려고 한다. 포도밭에 방석을 깔고 앉아 와인을 마시면서 시뻘게진 얼굴로 우리 춤도 와인처럼 숙성 중일 거라며 “대체 언제 탱고 베이비 탈출하냐”라며 한껏 취해 칭얼거리다 오겠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