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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Dec 15. 2021

포도알은 숙성 중

탱고

오늘도 우울하다. 한동안 바빴던 일정이 끝나서 오랜만에 탱고를 추러 왔는데, 유쾌하지만은 않다. 축축 처지는 아르헨티나 가수의 목소리가 내 어깨에 차곡차곡 돌덩이로 쌓이는 것 같은 날이다. 탱고를 춘 지 벌써 몇 해째인데 나는 영 성장을 못하고 제자리인 것인지. 쭉 바쁘다는 이유로 연습을 못 했더니 나만 살찌고 춤도 못생기게 춘다. 누구는 저렇게 힘 있고 우아하게, 혹은 경쾌하게 동작을 하는데, 나는 아직도 조그만 코어 근육으로 중심축도 잘 못 잡는다. 생각하면 할수록 우울해지는 탱고를 나는 대체 왜 시작하게 되었을까.


내가 20대 중반일 때, 호기롭게 해외에서 살아보겠다고 부모님에게는 반(半) 통보를 하고 태국 방콕으로 무작정 떠났을 때였다. 당차게 떠났던 것과는 다르게 외롭고 지친다고, 나는 일만 하는 노예라고 징징대던 시기에 친구가 취미 생활을 가져보라고 추천했다. 친구의 말대로 나는 일로 가득 찬 일상에 일 이외의 것이 필요했다. ‘이렇게 살다간 깊게 파인 팔자 주름에 허덕이다 죽고 말 거야. 정신을 돌릴 곳이 필요해.’ 머릿속에 몇 번이고 되뇌며 댄스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리셉션에 있는 선생님은 다양한 춤이 있으니 개중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고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탱고를 추고 있는데, 탱고도 좋고, 살사도 좋다며, 다만 스윙은 선생님이 잠깐 비자 문제로 해외에 나갔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등록을 보류해놓고 집에 돌아와 유튜브나 구글을 통해 춤의 종류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탱고는 내가 생각했던(빨간 장미를 물고 추는) 것하고는 다르게 묵직하고 점잖은, 차분한 느낌이었으며, 살사는 무척 섹시했다. 손가락과 손가락을 맞대고 턴을 돌고 시원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매혹적인 눈빛으로 상대를 쓰다듬는 살사를 보며, 나에겐 저만큼 다부진 섹시함이 조금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금방 마음을 접었다.


사실 춤 학원을 등록하러 가기 전에 고등학교 동창을 따라 방콕에서 제일 큰 스윙 커뮤니티에 가본 적도 있는데,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으면서도 지치는 경험이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겨주는 그 활기참이 고마웠지만 금세 나를 잿빛 모래 알갱이로 부스러지게 하는 기분이었다. 내향적인 성격 때문인 것 같았다. 그 활기에 힘껏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우선은 지친 에너지를 달랠 곳이 필요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보다 적당히 데면데면한 그런 무관심이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상대적으로 덜 북적이고, 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탱고였다. 흔히 영화 <여인의 향기>라든지, 인생의 버킷 리스트라든지 등으로 시작하는 대단한 이유와는 동떨어진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살사처럼 거친 섹시함을 표현하지 않아도, 적당히 에너지를 충전하면서 음악도 듣고, 몸을 움직일 수도 있는 선택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뭐든 적당한 것을 선호하는 나한테 딱인 듯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처음에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적당해 보인다고 쉽게 선택한 나에게 보복이라도 하듯 탱고는 곧장 내게 거친 파도 같은 난관을 맛보게 해주었다. 탱고 클럽인 ‘밀롱가’에서 두세 시간을 벽에 앉아 남이 춤추는 것만 구경하고, 나랑은 아무도 춤을 춰주지 않는다거나 나랑 춤춘 친구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거나 할 때마다 속상했다. 밀롱가에 갔다가 아주 우울해져서 돌아오는 일도 다반사였다. 무엇보다 응축되어 있으며, 밀도 높고, 견고한 춤이 탱고였다. 섬세하고 어려웠다.


초반에는 정말 열심히 배웠다. 사실 지금도 무색하긴 해도 여전히 배우는 중인데, 이놈의 탱고를 대체 언제쯤 즐기며 출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 보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매주 밀롱가에 춤추러 가는 걸 보면 이 고통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 보니 어딘가에서 춤은 옛날의 활쏘기처럼 심신 수련의 한 방편이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춤이 건강하고 역동적인 몸과 선하고 정제된 내면을 만든다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다. 끈기라곤 없는 내게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게 하는 인내심을 길러주니 말이다. ‘다음에는 상대를 무겁게 하지 말아야지. 다음에는 조금 더 음악에 맞춰 즐겁게 춰 봐야지. 그리고 상대에게 조금 더 집중해 봐야지’ 하는 이런저런 고민들 때문에 몇 년째 어질어질한 것 빼고는 좋은 점도 많다. 탱고를 시작한 뒤로 요가, 필라테스, 헬스, 발레 다 조금씩은 해보았다. 나름 몸 관리를 하는 셈이다.


예전에 누가 탱고는 와인과 같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농익고 숙성된다고 했다. 이 말은 한국이나 해외에서 탱고를 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통하는 말이다. 탱고라는 게 원래 오랜 기간을 두고 천천히 완성되는 거라고 생각해 버리면 마음이 좀 편한 것 같다. 내가 비록 수년째 포도알에서 와인으로 진화가 안 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와인 탱크 안에서 얌전히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언젠가 나도 맛있고 깊은 와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조그맣지만, 언젠가는 코어도 좀 커지고, 중심 축도 힘 있고 꼿꼿하면서도 탄력 있는 탱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하찮은 포도알이 된 것 같은 때에는 먼 미래에 깊은 맛의 와인이 된 내 모습을 떠올리며 행복한 자기 암시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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