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배 Jul 19. 2022

탱고대회 마지막 편

무대에서 내려와서 조용히 주차해 놓은 자동차로 향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칭얼거리기도 하고, 멋쩍은 웃음을 짓기도 했다. 너무 예뻤다고 잘했다는 말보다 “옷이 위로 올라가서 배가 보이더라. 더 화려한 옷을 입지 그랬어. 큰 귀걸이가 더 좋았을 텐데 ” 등의 말이 머리에 꽂혔다. 아무래도 내 실력보다도 차림새가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종종 문제의 원인을 이상한 곳에서 찾는 오류를 범한다. 그날이 그랬다. 내 차림새에는 잘못이 없었지만, 나는 옷을 탓했다.


서둘러 자동차로 가서 집에서 챙겨 온 바나나와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을 씹었다. 문득 ‘새까만 투피스보다 풀꽃 무늬의 긴 드레스가 더 잘 어울릴 거야. 나는 밋밋하게 생긴 편이니까 그나마 플로랄 원피스가 화려하니까 나을 거야’ 이런 생각을 했다. 먹던 걸 끝내고, 이온 음료로 입안을 헹군 뒤 풀꽃 드레스를 챙겼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던 이탈리아 탱고 드레스인데, 입었을 때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던 옷이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었다.


한참 옷을 갈아입고, 매무새를 살피고 들어왔다. 대회장 내부에서 기다리던 남편이 나를 보더니


“보배! 들었어? 우리 준결승 진출이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생각해 보니 옷을 갈아입을 때부터 준결승은 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역시 옷을 갈아입고 오길 잘했다고, 재정비된 모습으로 한 번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사실 이번 우리의 대회 목표는 준결승에 나가는 거였다. 몇 년 전에 남편과 나는 홍콩에서 온 탱고 친구들과 나간 대회에서 우리만 예선에서 떨어졌던 전적이 있다.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 그러니까 홈그라운드에서 우리만 떨어지는 서글픔이란.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준결승만이라도 진출하고 싶었다.


곧장 다음 무대를 준비해야 했다. 바꿔 입은 꽃무늬 옷이 나를 지켜줄 것만 같은 게 꼭 아기장수 우투리의 날개를 얻은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남편과 웃으면서 다음 무대를 준비했던 것 같다. 복숭아 맛 소주를 원샷하고 온 덕이다. 새까만 무대 밖에서 앞팀들이 추는 무대를 보면서 차분히 다시 기억해야 할 것들을 떠올렸다.


‘가슴을 펴고, 고개는 들 것, 우리가 눈에 띄어야 하니까 동작을 과장하며, 빠른 곡은 딸꾹질하듯이…’


무대에 올랐다. 예선전처럼의 치열함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춘 것 같다. 춤을 추고 나오니 속이 시원했다. 아무래도 내가 목표한 만큼의 성적은 나왔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래 준결승이면 충분해. 갑자기 설득해서 나간 대회에 몇 번 연습도 못했는걸’.


결승에 진출할 커플들이 호명되기 시작했다. 마음은 접었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쥐었다. 가슴 깊은 곳엔 기대도 있었다. 혹시라도 아르헨티나 댄서들 눈에 우리의 춤이 꽤 괜찮아 보여서 행운처럼 좋은 점수를 받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하면서 말이다. 사회자는 영역별 결승 진출자들의 이름을 큰 소리로 괜스레 자랑스럽게 들리도록 외쳤고, 나는 마음속 조그만 뚝배기에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것 같은 마음으로 기다렸다. 호명된 사람들은 반짝거리는 드레스 때문인지, 머리에 바른 포마드 때문인지 유독 광택이 나는 모습으로 위풍당당하게 무대로 올랐다.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여전히 무대 밖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초조한 눈빛이 보였다. 나뿐만이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렁그렁한 것 같기도 하고, 무거운 돌덩이를 어깨와 머리에 쌓은 것 같은 표정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호명이 될 때마다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두 손 모아 짝짝 박수를 쳤다.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었다. 결승에 진출한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연습에 열을 올렸을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탱고의 매력은 오랜 세월 함께 탱고를 춰도, 모두가 정체되지 않고, 어떤 부분에서든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아마 그런 모습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대회장일 것이다. 내가 대회장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부산에서 KTX를 타고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올라온 열정의 악기 장인 아저씨가 계셨다. 그는 예전에 시니어 탱고 챔피언을 했던 분이기도 한데, 아쉽게도 이번에는 결승에 오르지 못했다. 그의 탱고 정장이 유독 까맣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아저씨의 새하얀 피부가 유독 돋보였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이번에는 평생 춤을 췄지만, 탱고를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발레리노가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직 그의 이름이 호명되기 전인 것 같았다. 그는 탱고 경력이 오래지 않았을 때 나갈 수 있는 부문인 ‘뉴스타’ 영역의 기대주이다. 다행히 곧 그는 결승에 진출했다. 초조했던 눈동자가 금세 반짝였다.


나와 남편의 이름은 결국 불리지 않았다. 꼿꼿이 세우고 있던 허리에 긴장이 풀렸다. 순간 복근의 힘도 날아가버렸는지 들판의 굽어버린 벼처럼 앉아 있었다. 그래도 두 손만큼은 열심히 박수를 쳤다. 무대에 오른 사람 모두 정말 아름답고 근사했다. 같이 탱고를 시작했던 언니 오빠도, 대회 당일 내 머리를 야무지게 묶어줬던 언니도, 함께 동호회에서 두 달간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도 다 멋있게 무대에 올랐다. 부러움과 감탄이 줄지어 마음에 흘렀다. 또 한편으로는 그간 나의 탱고 생활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얼마나 불철주야 연습하는지 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손이 빨개지도록 박수를 쳤다. 조금 더 열심히 할걸 아쉬움도 들었다.


마지막에 있었던, 단 한 번의 결승 무대는 대단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열정이 관객석까지 터져 나왔다. 온 우주가 무대 안으로 쓸려 들어갈 것 같았다. 강한 힘으로 외부의 또 다른 우주를 무대 안으로 흡입하는, 수축하는 천체 같았다. 무대 외부에서 구경하는 작은 별인 나는 눈을 붉은 드레스를 입은 볼레오 동작이 야무진 언니에게 두어야 할지, 생동하는 물고기처럼 춤추는 커플에게 두어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 타인의 열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이토록 매력적이다.


무대를 채우는 블랙홀 같은 색색의 결승 진출자들, 무대 밖 새까만 의자에 앉아 숨죽이고 파이널 무대를 보는 무수한 작은 별들. 대회장은 하나의 우주였다. 각자 자리에 존재함으로써 우주 지평선 밖으로 이어진 우주를 함께 만들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탱고인이 춤을 향한 순수한 열정 하나로 모인 대회장에는 태양도, 블랙홀도, 작은 별도 있었다. 모든 게 흠도 티도 없이 온전했다.




저와 남편은 15번째 소행성이 되어 대회를 마무리했습니다. 두 달 전 있었던 대회가 벌써 어렴풋합니다. 이야기는 필자가 전달하고 싶은 방향으로 조금의 편집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이전 03화 탱고 대회 2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