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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Jun 20. 2022

탱고 대회 2편

망시지탄(망한 것에 대한 탄식)

대회 당일, 커피를 내리면서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새벽 1시쯤 잠에 들었고, 나는 2시쯤 잠들었다. 일어난 시간은 오전 5시 반. 3시간 남짓 잤다. 준비하고 나가면, 홍대에는 7시 50분쯤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눈 뜨자마자 커피를 마셔야 오전을 졸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달달한 바나나를 깠다. 아침에 먹는 바나나와 커피는 정신을 맑게, 기분은 좋게 만든다. 달큰한 바나나 향을 맡으면 긴장이 이완되곤 한다. 바나나 하나를 더 챙겨서 남편이 자고 있는 침실로 갔다.


바나나로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몸을 둥글게 굴리면서 일어났다. 덩치가 커서인지 종종 영웅 헤라클레스 같아 보이기도 한다. 오늘도 남편이 영웅처럼 잘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생각보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힘들어하고, 쉽게 긴장하는 편이다. 그에 비해 남편은 평소에는 묵묵하고 얌전한데, 멍석만 깔아주면 누구보다 활기차고, 몸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화통한 목소리도 잘 낸다. 아마 오늘 대회에서도 그는 긴장을 안 할 것이다. 그런 남편을 보며 탱고 선생님들은 그는 우아하고 자신만만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달리 덜 자란 소녀 같아 보일 때가 있다고 피드백 받은 적이 있다. 무대공포증이 없는 남편이 늘 부럽다.


남편과 나는 탱고 동호회에서 처음 만났다. 처음 탱고를 시작한 새내기 탱고인들은 2개월가량의 수업을 듣고, 다시 2개월을 바짝 연습해 동호회 사람들 앞에서 발표회를 하는데, 그때 남편은 내게 발표회 파트너를 제안했다. 그 당시에도 나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무서워해서 발표회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내가 참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어느 주말이었을까.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낯설지만 순박한 청년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보배 님, 혹시 발표회 파트너 구하셨어요?”


그는 정중했고, 차분했다. 수업에서 짧게 지켜본 바로는 열심히 탱고를 배우고, 말씨가 고운 사람인 것 같았다. 같이 탱고를 연습해도 크게 갈등이 생기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였을까. 나는 왜인지 그의 파트너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일을 마치고, 늦게서야 답장을 보낼 수 있었다. 한참 기다렸을 거라 미안했다. 이후에 한 30분 정도 통화를 했던 것 같다. 남편은 전화로 자기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남편이 내게 사귀기 전에 써준 글에 의하면, 파트너십을 신청하던 날 그는 내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내가 주로 바쁘다고 이야기했던 시간에 맞추어 메시지를 보내 놓았다고 했다.


그는 발표회에서도 북적이는 사람들 앞에서 역할극을 하고,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고, 너스레를 떨며 탱고를 췄다. 연습을 하며 수줍어했던 그의 모습은 무대에 오르자 사라졌다. 나는 아마 그때부터 남편을, 당시에는 사귄 지 나흘째인 남자친구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내게는 없는 모습이 정말 ‘오빠’ 같았다. 교회 오빠가 무대에서 악기 연주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면 사랑에 빠지는, 그런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 나도 남편처럼 긴장 좀 덜했으면 좋겠다. 무대에 서기 한 시간 전에는 꼭 복숭아 맛 소주를 원샷 해야지.’ 생각하며, 새로 산 고데기로 머리를 말았다. 머리로는 선생님이 당부했던 내용들을 복기했다.


‘가슴은 펴고 고개는 들 것, 서로를 존중하는 제스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무대에 올라 다른 커플들보다 절대적으로 우리가 눈에 띄어야 한다. 그러려면 동작을 과장해서 할 필요가 있고, 빠른 곡은 딸꾹질하듯이….’


한참 머릿속으로 복습하고 있는데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났다. 동그란 고데기에 머리가 껴서 빠지지 않았다. 남편이 영웅처럼 나타나서 엉킨 머리카락을 고데기에서 빼주었다. 꽤 듬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면 될 거야. 오늘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남편의 손을 꼭 잡고 귓속말로 떨린다고 래퍼처럼 읊조렸다. 남편은 천천히 웃으며 떨릴 게 뭐 있냐고 했다. 우리는 차례가 되어 무대에 올랐다. 검은 배경의 무대에 투명하고 번쩍이는 스포트라이트가 우리를 비췄다. 나만 빼고 무대에 오른 모두가 여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적수를 만난 길고양이마냥 몸을 크게 부풀리고 팔을 큼직하게 흔들며 씩씩하게 무대를 걸어 나갔다.


우리가 추게 될 세 곡의 노래 제목과 악단 이름이 나왔다. 사회자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현란한 스페니쉬 발음으로 이야기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주로 연습했던 악단은 아니었다. 내 동공은 갈 곳을 잃었고, 남편은 내게 다가오며 마스크로 감춰진 입으로 야무지게도 힌트를 주었다.


“다리엔소”


‘후안 다리엔소 Juan d’Ariezo’는 아르헨티나 탱고 대표 작곡가이자 지휘자인데, 신나는 음악의 대명사라고 생각하면 쉽다. 보통 대회에서는 ‘신나는 곡, 서정적인 곡, 강렬한 곡’이 한 세트가 되어 나오고, 거기에 즉흥으로 춤을 추면 된다. 우리에게 나온 곡은 ‘디살리, 프레세도, 앙헬리스’의 음악이었는데, 이 중에 나는 특히 ‘앙헬리스’에서 망연자실했다. 앙헬리스의 음악은 들을 때마다 난해하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머릿속에 물음표만 떠다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남편은 내게 다가오면서 살짝 힌트를 준 것이다. 이 곡은 신나는 다리엔소 느낌으로 추면 된다고 말이다.


비장한 눈빛도 함께 주고받았다. 리듬감 넘치는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손을 마주잡고 음악에 몸을 맡겼는데 무슨 일인지, 머릿속에서 복기했던 모든 것이 새하얗게 날아갔다. 나만 그럴 줄 알았는데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애매한 앙헬리스 때문인가…?’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이 왜 이럴 때만 적용되는 것인지 눈가가 촉촉해져 왔다. 우리는 신나는 음악에 똑같은 동작만 약 20번 정도 반복하고, 드넓은 무대에서 하필이면 심사위원 코앞에서 스텝이 엉키는 실수를 한 뒤에 무대에서 내려왔다. 버벅거리는 우리의 발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르헨티나 댄서 심사위원은 곧 손을 채점표로 옮겼다. 망했다.


(다음 편에 계속)


1970년대 다리엔소의 지휘 모습

하단 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3Z5qEKxfmm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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