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함이 적당하다
침울하다. 딱히 잘못된 것은 없다. 그냥 남들만큼 어렵고 남들만큼 힘들뿐이다. 우울함이 적당하다. 그러나 이 애매한 우울이 삶에서 활력을 내지 못하게 한다. 몸에 나쁜 것만 골라 먹고 싶다. 그럴 때 내가 나만을 위해 하는 일이 있다. 예쁜 속옷 입어주기. 나만 볼 수 있는. 내가 나에게 주는 위로이다. 예쁜 속옷을 입고 청소를 열심히 한다. 예쁜 속옷을 입고 장을 보러 간다. 첫째 딸이 방울 토마토가 먹고 싶댄다. 생일날 뭐가 제일 먹고 싶냐고 하니 방울토마토가 먹고 싶다고 한다. 예쁜 속옷을 입고 방울 토마토를 사러 간다.
탱고를 시작하고 배우고 밀롱가에 가면서 제일 좋았던 게 있다. 바로 내가 나를 위해 화장을 한다는 것이었다. 잘 보일 남자도 없고 잘 보일 사람도 없다. 그냥 내가 나를 위해서, 내 맘에 들게 옷과 화장을 나에게 바른다. 신부화장 이후로 한 번도 화장을 해본적이 없는 내가 스스로를 위해 화장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는 건. 나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다. 눈가에 쉐도우를 가볍게 바르면서 이렇게 설레이다니. 워낙 약하게 하는 화장이라 남들은 거의 모른다. 나만이 내가 한 화장을 알 수 있다. 이것도 맘에 들었다. 왜 갑자기 화장을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으면서도 알겠다. 그냥 나한테 설레이고 싶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 인생은 성공했다. 설레이는 걸 만났으니.
방울 토마토를 샀다. 아이들과 너무 붙어있었더니 조금 힘들었다. 그냥 잠시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별거 아니었다. 혼자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들어가는 거였다. 봄이다. 스타벅스에 가서 이름도 봄스런 체리블라썸 루비라떼를 주문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체리블라썸 루비라떼가 단종되었어요. 시즌메뉴여서요" "헐" 예쁜 속옷을 입고 혼자 앉아서 체리블라썸 루비라떼를 먹고 싶었는데. 다른걸 먹을까 찬찬히 메뉴를 열번을 훑었다. 다행히 뒤에 사람이 없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맘에 드는게 없었다. 어중찮은 걸로 우울함을 달래려다 폭망하는 경험은 여러번 해봐서 안다. 씽긋 웃어주며 "아 그러면 다음에 다시 올게요" 하고 나선다. 그러면 잠시 걷다 가지 뭐.
평소에 비해 둘레둘레 동네를 살핀다. 커피를 마셔도 좋고 안마셔도 좋다. 다만 어중간한 걸로 내 적적함을 채우긴 싫다. 난 오늘 예쁜 속옷을 입었으니까. 예쁜 속옷을 입고 내가 나와 데이트를 하는데 맘에 드는 것만 하자. 나랑 데이트 할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잖아. 동네에 있는 커피숍 내부를 찬찬히 살펴본다. 너무 밝다. 너무 명랑하다. 괜히 심술이 난다. 예쁜 속옷에게 미안하다. 안절부절 한다. 남자들이 뭔가 잘 보이고 싶을 때 안되면 이런 마음일까? 이해해줄 걸 알면서도 괜히 겸연쩍다.
그러다 눈에 띈 간판이 있었다. 커피집이 특이하게 2층에 있다. 보통 2층에 커피집을 잘 본적이 없는데. 갸웃갸웃 하다가 들어가봤다. 허름한 건물에 2층 커피집. 장사가 될까나. 하고 커피집에 들어섰는데. 헐. 왠 양주들이 가득했다. 내부는 어두웠다. 밖은 낮인데 안은 밤인 것 같았다. 직원은 4명인데 나까지 손님은 두명이었다. 아무리 봐도 커피집 같지 않은데. 밖에 나가서 다시 한번 간판을 확인했다. coffee. 음. 맞군, 하면서 카운터로 갔다. 다행히 카운터 앞에 메뉴판이 있었다. 커피들이 메뉴판속에 나열되어 있었다. 다람쥐를 닮은 남자직원과 옆에서 보면 여우를 닮았는데 앞에서 보면 늑대개를 닮은 머리가 매우 작은 여자직원이 서 있었다. 보니까 이집의 추천메뉴는 카푸치노와 라떼 란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물어봤다 " 저 제가 처음이어서 그런데 뭐가 제일 맛있나요? 추천해주실 만한게 있나요" 다람쥐를 닮은 남자 직원이 힘차고도 민첩하게 말을 한다.
"카푸치노하고라떼모두잘나가요저는처음이시라면 저는카푸치노를먼저추천드릴게요"
띄어쓰기를 할 수 없는 말투였다. "아, 네 카푸치노 부탁드릴게요. 마시고 갈 거에요"
빈 자리에 앉았다. 여우와 늑대개를 닮은 잘생긴 여자직원이 따뜻하게 데워준 잔받침을 가지고 왔다. 잠시후 다람쥐를 닮은 남자직원이 왔다. 중이염과 음악소리 때문에 정확히 듣진 못했는데 이 집 카푸치노는 우유거품때문에 만들자마자 마셔야 한단다. 본인 앞에서 시음을 해야 한다며 내 자리로 와서 내 앞에서 커피거품을 내려 하트를 만들어주고 잔을 든 채로 한모금 먹여주었다. 아이처럼 받아마셨다. 거품은 매우 맘에 들었는데 커피가 생각보다 연했고 시나몬파우더가 없는 게 조금 아쉬었다. 그래도 의도하지 않게 누가 잔을 들어 먹여주는 커피를 먹는다는 게 신선했다. 그러고보니 누군가 나에게 음식을 먹여준 적이 잘 없구나.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과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내가 평소에 겪지 못한 걸 겪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벽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는다. 커피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커피 마시는 기분을 좋아한다. 가끔은 이 기분만 살 수는 없을까. 배는 부르고 마시긴 싫은데. 이 기분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 기분을 사고 싶어서 커피를 마시니까 뭐 그게 그거네.
집에 아이들이 있는지라 20분만 앉아있다 일어섰다. 오늘의 데이트는 만족스러웠다. 자세히 보니 새벽 2시까지 영업을 하는데, 8시 30분 이후는 커피를 팔지 않고 알콜을 판다고 써 있었다. 위스키를 넣은 아이리쉬 커피를 만드는 걸 직원들은 연습하고 있었다. 자기들 끼리 마시고 뭐라뭐라 서로 말하고 있었다. 낮에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여기 와서 앉아 있어도 괜찮겠다. 밤에도 올까? 누구랑 올까? 밤에 아이들을 재우고 혼자 와서 앉아 있는게 더 좋겠다. 내가 나랑 데이트를 하는 곳이니 굳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겠다. 내가 나에게 가볍게 눈을 흘긴다. 나가면서 쿠폰을 찍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장바구니에 든 방울 토마토랑 함께 집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