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공간에 대하여

-나를 길들이고, 내가 길들이는 곳

by Selene H

유년 시절의 나의 방은 햇살이 가득했다.

책상에 앉아 바라보는 창문은 사계절의 공기와 빛을 담뿍 쏟아냈다.

창 밖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있었는데, 봄의 온기를 내게 선물로 주었던 소중한 친구였다.

이제 막 무르익는 중인 봄의 햇살들이 벚꽃 사이사이로 비치며 봄바람에 흩날렸고,

그렇게 매년 봄마다 내 방은 여린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밤에는 가로등 빛을 머금은 밤 벚꽃들을 바라보며 라디오를 듣곤 했다.


20대 시절 나의 방은 단열이 잘되지 않는 탓에 곰팡이가 자주 번졌다.

부모님은 늘 마음 아파하시며 곰팡이가 생긴 부분을 닦고 새로운 벽지를 붙여주시거나 예쁜 커튼으로 가려주셨다.

한겨울에는 특히 더 심해지는 곰팡이의 모습들이 불편했지만, 그 방안에서도 나는 나만의 의미가 담긴 물건들을 정리하고 배열하며

방 한쪽에 나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마음껏 웅크릴 수 있는 나만의 공간.


지금은 모두 지나간 이야기가 되었고

나를 둘러싼 환경도 달라졌지만,

공간과 함께 물들어 가는 나의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머무는 공간은 나의 호흡이 만든 질서로 길들여져 왔다.

또 나도 그 공간에 가면을 벗은 나를 마음 놓고 맡겼다.




철학자 볼노프는 인간은 ‘거주함’을 통해 나만의 내적 질서를 세워가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본다.

집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사이의 담장이 되어,

끝없는 변수들로 가득 찬 험난한 세계 속에서 하나의 중심이 되어준다.

우리는 내적 공간인 집에 닻을 내리고 외부 세계로 나아간다. 또, 외부 세계의 공격으로부터 후퇴하여 요새로 돌아와 마음껏 웅크린다.

어쩌면, 내가 거쳐온 공간 중 가장 작고 초라했던 20대 시절의 나의 방이 내겐 특히 더 그러한 요새였던 것 같다.




볼노프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스스로 선택할 권한이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허브의 성장과 같다.

건강한 허브를 키우기 위해서는 노지의 해와 바람이 필요하다.

쨍쨍 내리쬐는 해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에서 부는 바람에 의한 흔들림은 허브 고유의 아름다운 향을 내도록 단련시킨다.

하지만 때론 흙의 영양분을 온전히 흡수하고 휴식하기 위해 실내의 따사롭고 조용한 햇빛 아래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노지의 바람과 햇살은 인간에게는 사회라는 외부의 관계이고, 온실 속의 조용한 햇살은 내적 성찰의 시간과 같다.


인간에게 있어서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은

이 두 공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것에 대한 선택의 자유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일러스트 © Selene H | ChatGPT (OpenAI)를 활용해 생성한 이미지



따라서 인간은 외적 공간과 대비되는

자신이 거주하는 내적 공간을 고유한 방법으로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생긴다고 볼노프는 강조한다.


공간의 의미는 결코 값비쌈과 화려함을 통해 가치가 결정되지 않는다.

삶을 끌어가고자 하는 의지로 사물을 정돈하고,

나의 영감을 고양시키는 상징물들로 채워진 공간의 모습들이 공간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이다.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진 벽과 마룻바닥.

시부모님의 집은 세월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닦고 보살핀 손길 덕분에 매끄러운 윤기가 흐른다.

아랫 마루에서 윗 마루로 올라가는 목조 계단을 밟을 때마다 나는 기분 좋은 삐걱 소리.

이 계단은 집안 구성원들의 체온이 담긴 수십 년간의 발걸음을 그대로 담고 있다.

오래된 샹들리에, 이제는 작동하지 않는 80년대의 전축.

선반과 벽에 걸린 수많은 계절을 겪은 빛바랜 사진들은 가족들의 존재를 공간에 머무르게 한다.


윗 마루에 위치한 성모상과 성물이 모여있는 집 안의 작은 성소는 마치

하이데거가 말한 거주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방세계(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인 인간)’를 품고 있는 독일의 슈바르츠발트 농가의 모습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사물과 세계 속에 거주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 방식을 드러낸다고 본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성찰하듯,

사물과 세계 속에 머무는 방식을 통해 인간은 나의 존재적 자아를 확인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거주함’이라는 것은

인간이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자신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땅의 온도, 자연의 리듬인 하늘, 신 적인 것들에 대한 경외, 그리고 죽음을 인식하는 인간의 유한함이 서로 조화되어 있는 상태가 진정한 거주이며,

이는 곧 존재의 방식이기도 하다.




어쩌면 시부모님은 집에서 단순히 머무르셨던 것이 아니다. 40년의 세월 동안 집과 함께 숨 쉬며, 시간의 빛과 그림자를 품어 당신들의 존재를 완성해 오신 것이다.




팔순이 넘은 두 노인은 오늘도 이 공간을 느릿느릿, 그리고 정성스럽게 보듬는다.

걸음이 느려지고 귀가 어두워지신 아버님은 얼마 전, 거칠고 두툼해진 고목나무 같은 손으로 여린 나무 조각을 깎아 성모상을 손수 만드셨다. 그리고 집안의 성소에 올려두셨다.


우직한 고목나무 손에서 탄생한 성모상은 뒤늦게 얻은 기쁨인 두 살배기 어린 손주의 작고 꼬물거리는 손길과 만난다.

어머님이 끊임없이 닦고 윤을 낸 나무 계단은 작고 경쾌한 아기의 발걸음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공간은 또 가족의 역사를 끊임없이 품는다.


사진·일러스트 © Selene H | 직접 촬영한 사진을 ChatGPT (OpenAI)로 일러스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