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타인의 고통,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방식

소비되는 고통

by Selene H

오래전 방영되었던 시트콤에서 본 장면이 떠오른다.

방 안에 옹기종기 모인 식구들이 TV 뉴스에 나온 각종 재난, 사고 소식을 보는 장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 불행들을 보며 그들은 가족들과 함께 큰 소리로 걱정과 탄식을 뱉어낸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어딘가 조금은 즐겁고 편안해 보인다.

며칠 뒤, 그들이 늘 즐겨보던 TV 뉴스에서 행복한 소식들만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씁쓸한 표정의 주인공들은 갑자기 서로 대화가 끊기고 조용히 TV를 끈다.

허탈함이 가득 찬 표정으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정말 아프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다른 이의 고통을 마주한 우리는 이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일까.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말이 있다. 독일어로 Schaden(피해, 손해)라는 말과 Freude(기쁨)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로, 타인의 불행을 보고 느끼는 쾌감 또는 안도감을 의미하는 인간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어딘가 어설프고 부족해 보이고, 항상 실패를 일삼는 타인을 ‘우스꽝스럽다’란 말로 정의하며 즐거워하는 이유는 그러한 타인의 모습이 나의 자아의 위치를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더 나아가 우리는 고통이 담긴 이미지를 감상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또 공유하는 순간에 ‘나는 선한 사람이며, 저 정도로 고통스럽지 않다’라는 무의식의 우월감과 안도감을 가지는 것은 아닐까?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를 쳐다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은 그런 고통을 격감시키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나,
그런 고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의도했든 안 했던, 나머지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
-Susan Sontag-

비평가이자 사상가인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그녀의 에세이 「타인의 고통」에서 전쟁과 폭력의 참혹함을 담은 사진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현대인들의 시각 문화를 비판한다.

전쟁 중 사망한 군인의 훼손된 신체의 모습들, 각종 차별과 혐오의 역사 속에서 잔혹하게 희생된 희생자들의 사진들을 접한 우리는 처음엔 충격을 받지만 곧,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이렇게 감각이 마비된 대중들은 한편으론 무의식 어디쯤의 쾌락감을 느끼기도 한다. 잔인한 고어 무비를 보며 눈을 가리지만, 내면 어딘가엔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는 묘한 안도감을 느끼듯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Susan Sontag-

더 나아가 사람들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인류의 잔혹함이 자행된 장면들을 단순 감상했다는 사실로부터 윤리적 행위를 했다는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손택은 지적한다.

또한, 현상을 날것 그대로 고발하는 역할을 지닌 사진이라는 것도, 한편으론 그것을 담아낸 사람의 시각과 프레임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단편적인 순간만 담을 뿐, 현상에 대한 진실 전체를 담아내지는 못한다는 한계도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진들을 그저 현상의 단편에 불과한 것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

또 그것을 마주하는 우리는 그저 타인의 고통을 관람만 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들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1972년, 남베트남군이 쏜 네이팜 탄에 온몸에 화상을 입고 울부짖으며 달려 나오는 9살 소녀의 공포에 질린 표정이 사진에 담겼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을 폭발시켰으며, 전쟁의 도덕적 명분을 상실시키는 결정적인 힘을 발휘했다.

1987년, 최루탄에 맞아 생명이 시들어가는 한 대학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시민의 힘으로 대한민국의 민주화의 꽃 봉오리를 활짝 피게 만든 결정적인 촉매제가 되었다.

사진이 지닌 한계와 소비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손택의 말처럼 사진은 '현상을 기억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 이제는 그러한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우리의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Susan Sontag-

우리는 고통의 모든 순간에 동참한 당사자가 될 순 없지만, 그러한 순간에 대해 모두 책임의 짐을 진 당사자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나’란 존재의 안전한 생존은 결코 공동체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낸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타인의 손길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며, 인드라망과 같이 연결된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생존을 이어간다.

나란 존재는 나 자신이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타인 속에서 정의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어느 정도의 빚을 진다.

이렇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부채 의식과 책임감을 인식한다는 것은, 인류의 고통에 용기 있게 개입할 수 있는 잠재적인 내면의 씨앗을 심어 두는 것과 같다.





타인과 나를 분리시키는 사회는 고통에 무뎌지게 만든다.

그러나, 빠르고 완벽함, 결과 중심적 사고 등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이념들은 현대 사회의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으며, 개인을 타인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각자의 고통을 ‘너의 책임’으로 돌리게 만든다.

조금만 느리거나 불안정하면 ‘노력이 부족한 사람’, ‘게으른 사람’과 같이 사회적 가치가 떨어지며 마치 도덕적으로도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이러한 모욕감과 그로 인한 자기혐오는 결국 타인에 대한 혐오와 냉소로 이어진다.

단절되고 고립된 개인들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기보다 관람하거나 소비하기 쉬운 상태가 된다.

‘00충’과 같은 비하표현, ‘긁혔냐?’와 같은 날카로운 말들.

우리가 쓰는 단어들은 이미 서로의 상처를 가볍게 소비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기적이거나 또는 타인을 시기 질투하여 폄하하는 사람들을 비난함으로써 일종의 ‘정의 실현’을 하는 단어 같아 보이지만,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현상들을 단순한 감정의 반응으로 축소하고, 정당한 비판들 마저도 손쉽게 무력화시킬 수도 있는 말들이다.

이들은 결국, 고통의 원인을 구조가 아닌 개인의 결함으로 이동시키며, 타인의 취약함을 가볍게 소비하는 문화를 강화한다.

혐오가 자연스럽게 발생하도록 설계된 게임의 규칙을 보지 않고, 그 안에서 서로를 공격하는 게임의 아바타가 되어버릴 때 우리는 더 깊은 위험에 놓인다.

히틀러라는 절대 악을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대중의 혐오를 기민하게 활용했던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대중의 심리가 있었음을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나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인 타인이기에,
그의 고통이 나에게 책임을 호출한다.
-Emmanuel Levinas-


우리는 모두 다르다.

이 세상에 던져지는 순간부터 각자가 경험하는 시간도, 장소도, 느끼는 것도 무엇하나 같을 수가 없다. 따라서 내가 직접 겪지 못한 모든 고통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끌어와 이해한다는 것은 고도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인을 ‘나의 인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 즉, 타인은 나의 이해의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 ‘절대적 타자’라고 말한다.

타인은 내가 이해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나에게 윤리적 책임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취약한 상황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전쟁과 학살의 화염 속, 사진 속 아이들의 공포에 질린 얼굴은 어떤 설명을 덧붙이기도 전에 먼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다가와 멈추게 한다.

‘나를 해하지 말라’는 고통스럽고도 동물적인 호소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윤리적인 행동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책임은 내가 주체가 되어 판단하고 선택하는 의무가 아닌, 타자의 고통이 나에게 다가오는 순간 이미 발생해 버린 윤리적 부름인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부름에 응하여 그의 취약함과 고통에 대해 책임을 나눠 가져야만 한다.


타인의 고통은 우리가 끝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책임을 결코 가볍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고통을 쉽게 소비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고통 앞에서 잠시 멈추고,

인간적 고통과 취약함이 우리에게 주는 흔적을 받아들이고 응답하려는 마음과 노력.

그것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인간다움의 최소 조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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