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이라고 불러온 것들
사랑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좀처럼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글에 담아내는 작업은 단순히 감정을 고백하듯 털어놓는 작업이 아닌, 나 자신의 복잡한 사유의 구조와 판단을 적나라하게 해부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이라 생각해왔던 경험들을 열어보고, 파헤쳐야 하는 과정이 수반되는데, 이는 창가에서 쏟아지는 카타르시스와 같은 석양을 느끼는 것처럼 결코 아름답고 아련하지만은 않다. 방패와 갑옷 없이 철저히 발가벗은 상태로 내면의 메스 하나에 의지한 채 차갑고 어두운 숲에서 길을 찾아가는 여정에 가깝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사랑 했던 기억들은 정말로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목의 욕구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이기적 존재인 인간은 과연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일까.
사랑은 어떤 감정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닌, 능동적인 활동이며 결단이다.
-에리히프롬(Erich Fromm)-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사랑이란, 단순 감정이 아니다. 무언가에 빠지는 경험이 아닌, 자기 중심성을 극복하고, 타인의 존재와 삶에 책임 있게 개입하는 하나의 능력에 가깝다. 그것은 상대의 생명과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보호(care), 상대의 필요와 부름에 기꺼이 응답하는 책임(Responsibility), 독특한 모습이나 개성까지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수용하여 나의 욕망이나 의지로 상대를 통제하지 않는 존중(Respect), 상대의 깊은 본질에 대한 앎인 이해(knowledge)의 태도로 드러난다.
사랑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완전성을 부여하는
결정작용이다. -스탕달(Stendhal)-
스탕달은 「연애론」이란 소설에서 사랑을 ‘결정작용(Cristallisation)’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있는 소금 광산에서 관찰한 장면을 묘사한다. 소금물이 가득한 갱도에 나뭇가지를 떨어뜨리거나 담가두고 시간이 지나면, 나뭇가지는 소금 결정이 붙어 마치 보석으로 장식된 나뭇가지처럼 반짝이게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나뭇가지는 사랑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의 실제 모습을 의미하고, 소금물은 상대를 관찰하는 나의 상상과 욕망, 희망을 상징한다. 소금 결정이 붙어 반짝이는 나뭇가지는 나의 환상과 미화가 투영된 상대방의 모습이다.
스탕달은 이러한 비유를 통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사랑’이 기본적으로 얼마나 자기 도취적이고 맹목적인 환상인지 말하고자 한다. 그는 사랑을 네 가지 모습(열정적 사랑, 취향의 사랑, 육체적 사랑, 허영의 사랑)으로 분류하는데, 네 가지 중, 결정작용이 극단으로 실현되어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형태인 ‘열정적인 사랑’의 맹목성을 경계하고, ‘취향의 사랑’처럼 상대의 실제 모습을 바탕으로 환상에 기대지 않고 안정과 존중을 기반으로 한 사랑이 조금 더 합리적일 수 있음을 말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사랑을 어떤 것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매년 아이들과 에리히 프롬의 사랑에 대해 토론하고, 또 평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출제를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온 질문들이었다.
‘인간과 세상의 다양한 측면을 가르치는 것, 통념과 부조리한 부분까지도 주저 없이 검토하고 다루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기에.. 툭툭 던지는 학생들의 날 것 그대로의 질문들을 흥미롭게 여기는 나 임에도 주저하게 되는 점들이 많았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아이들과 난상 토론을 벌인다는 것은, 교사로서의 페르소나를 모두 내려놓고 나 자신의 모든 사유의 구조와 개인적 세계관을 아이들에게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다소 보수적일 수도 있는 교직 사회에서 사랑에 대한 사유를 지나치게 개인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윤리 교사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인식될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굳이 아이들에게 ‘밀란 쿤데라의 소설 속 인물’처럼 느껴지는 선생님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결혼과 진정한 사랑
프롬이 우리에게 제시한 사랑의 네 가지 조건들을 가만히 곱씹다 보면, 이러한 능력들이 어떤 조건에서 가능해지는지 의문이 생긴다. 보호, 책임, 존중, 이해는 사실상 서로에 대한 지속적인 삶의 공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성립이 어려운 능력들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 조건들은 사랑의 시작 단계에서는 확인되기 어려워 보이며, 사랑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검증될 수 있을 것이며, 비로소 사랑의 끝에 가서야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것들로 보인다. 단순 감정의 사건이 아닌, 시간을 통과하며 차곡차곡 쌓아온 윤리적 태도의 총합에 가까워 보인다. 한편으로는 마치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의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프롬의 입장을 확장시켜 사랑을 감정 상태가 아닌, 삶을 함께 떠안겠다는 구조적 책임으로 정의하게 된다면 어떨까?
연애 단계에서 연인 사이의 떨림과 설렘을 여전히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랑이 아닌 ‘욕망과 욕망의 만남’ 또는 엄밀히는 ‘사랑에 대한 기대’로 칭해야 더욱 적절할 것이다. 결국 삶과 공동체의 공유가 전제되지 않은 사랑은 진정한 사랑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에 대해 반론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프롬이 제시한 조건들은 삶을 공유를 전제하더라도 모두 얻어지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결혼 안에서도 실패할 수 있고, 결혼 밖에서 성립할 수도 있다.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인 ‘배려’는 결혼 속에서도 없는 경우가 있으며, 상대의 부름에 대한 자발적 응답인 ‘책임’은 부부간의 의무인 법적 책임으로 대체되어 설명될 수 없다. 인격과 존재에 대한 존중은 부부 사이에서 쉬이 먼저 무너지는 요소이기도 하며,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는 평생을 함께 살아도 끝내 모를 수 있는 것 이기도 하다.
이처럼, 결혼은 진정한 사랑이 성립될 수 있는 ‘형식’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사랑의 실질적인 ‘내용’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
사랑은 그저 소금 결정과 같은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스탕달의 주장처럼, 사랑을 상대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한 ‘결정작용’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인간의 취약성에서 비롯된 심리적 작용이 사랑으로 착각되어 명명되는 것이며, 그것은 개인의 욕망과 기대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과잉된 의미 부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도 되는 것일까. 스탕달의 관점에 동의할 경우, ‘진정한 사랑’의 개념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이상으로 밀려날 수 있다.
다행히, 스탕달은 자신이 제시한 네 가지 사랑의 유형 중, ‘취향의 사랑’을 가장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사랑이라고 옹호함으로써, 사랑은 전적으로 환상에 불과하다는 냉소주의로 향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존재 가능성을 폐기하는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다시, 진정한 사랑의 정의에 대한 고뇌
나는 과연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일까. 결혼이란 제도를 선택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기로 했던 삶의 결단을 용기 있게 내릴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미 여러 종류의 사랑을 경험해 보았다는 데서 오는 사랑의 통찰에 대한 작은 자신감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의 사랑은 ‘내가 사랑한 사람’을 향했다기보다는, ‘나를 사랑할 사람’을 추구했던 것 이었던 것 같다. 상대 그 자체보다, ‘관계의 구조’에서 발생하는 모호한 긴장감과 낯섦을 즐기고 탐구하는 나의 욕망 체계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자는 ‘사랑이란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상대를 위해 감수하는 태도’라고도 한다.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시간을 나의 의지대로 나를 위해서만 온전히 사용한다는 것은 개인의 영혼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그래서 때론 ‘돈’을 사용하는 것이 나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 보다 쉬울 때가 있는 것이다.
아이를 낳고, 서로의 정해진 시간과 자유를 나누어 써야만 하게 된 지금, 내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때론 상대를 위해 내어주는 것을 배워가고 있는 시기. 자신의 시간과 자유를 나를 위해 조금 더 많이 내려놓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사랑의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하는 것보다,
그것을 쉽게 단정짓지 않으려 애쓰는 이 과정 자체도 하나의 정직한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대상에는 지식과 사유도 포함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