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언어는 우리를 움직이는가

‘풍부한 의미를 지닌 단어들은 대개 자체 모순을 품고 있다’

by Selene H

얇은 납판 위에 새겨진 수많은 언어들. 모두 누군가를 향한 단어들이다.

사랑을 속삭이는 문장, 축복을 담은 단어들이 적혀있을 것 같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라면 상대를 향한 연모를 품은 온기 어린 단어를 차디찬 납판에 새겨넣지는 않았을 테니.

납판 하나하나에는 상대를 향한 혐오와 비난의 단어들이 새겨져 있다. 마치 어떻게 하면 나의 ‘적’을 무너뜨리기 위한 치명적인 생채기를 낼 수 있을까 치열하게 고민하여 탄생한 작은 문자들. 시퍼런 납판 위에 적힌 작은 독거미 같은 단어들은 날카롭게 제련된 비수와 같은 느낌을 주며, 무언가를 패대기치듯 여기저기 제 멋대로 흩뿌려져 있다.

제주의 포도 뮤지엄에서 만난 제니 홀저(Jenny Holzer)의 작품《Cursed》가 내게 준 첫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언어를 활용하는데, 고대 그리스의 납판 저주 풍습을 차용하여 현대 사회의 혐오의 언어들에 대해 메시지를 던진다. 납판에 새겨진 정치적 혐오의 언어들을 통해, 온라인 공간에서 가볍게 확산된 말들이 영구화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누군가에 대한 적대와 원한을 납판에 새겨 우물이나 무덤 등에 뭍었다. 차갑고 무거운 금속인 납은 말의 힘을 고정하고 봉인한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우물과 무덤은 지하 세계와 연결된 장소이기에 정령이나 저승의 신에게 말을 전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납판에 새겨졌던 말들은, ‘그의 혀와 손을 묶어라’, ‘그녀가 다른 이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라’, ‘그의 밤을 불안으로 채워라’, ‘그의 일이 무너지게 하라’ 등의 말들이었다.

대부분의 단어들은 개인의 감정의 토로가 아닌, 상대의 능력이나 행위에 제약을 가하는 것을 염원하는 내용들이었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이 납판에 저주를 새겼던 이유는 ‘말이 현실을 작동시킬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 ‘입이 방정이다’라는 표현도 이러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기에 나오는 말일 것이다. 인생에서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거나, 불투명한 미래로 인한 불안 앞에서 ‘말을 삼가야 한다’라는 생각은 평소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류는 오래전부터 ‘말이 현실에 작용한다’를 믿어왔고 그러한 믿음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은밀히 지배하고 있다.


언어는 행위를 이끄는가

우리는 철저한 주권적 위치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주문을 걸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듯 언어가 우리를 이끄는 것일까.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의 한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집과 배를 마련하고, 선장이 된 남편, 그리고 토끼 같은 자식들.. 인생의 행복과 자신감으로 가득찬 애순은 자신의 삶의 원천이자 섬김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바다를 향해 소리친다.

“언제는 내가 뭐 용왕 믿고 살았어? 나 믿고 살았지!"

" 나한테 밉 보이면 굿판 날 곤밥 한 사발도 못 읃어 잡순다고! "

이 장면을 보며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젊디젊은 어린 부부의 넘치는 삶에 대한 의지에 벅찬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동시에, 애순의 소리침을 과묵하게 듣고 있는 잔잔한 밤바다가 어딘가 모르게 불안했을 것이다.

이 장면들이 시청자들에게 묘한 불안감을 주었던 이유는 우리가 말이 운명을 건드릴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곧 이어지는 장면 속에서 애순과 관식은 그들의 작고 말캉하고 따뜻한 아이 동명을 잃는다.


무한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도전을 하는 선언을 하면, 자연은 그러한 오만함을 단숨에 꺾어 버리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그들에게 인생의 자신감을 안겨주던 잔잔하고 어머니 여신과 같이 풍요롭던 바다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속의 냉혹한 군주처럼, 자비 없이 자신의 힘을 내보이며 우주 자연의 질서의 강력함을 인간에게 보여준다.

애순의 언어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신을 움직이는 하나의 ‘주술’이 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인 것일까. 사실은 애순의 말이 자연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말은 현실에 작용한다’고 믿어온 우리의 무의식적 사고가 반영된 장면인지도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이런 경험들을 한 번쯤은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시험의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있을 때, 또는 중요한 건강 검진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 사람들은 지나치게 확신하거나 오만한 말을 삼간다.

우리는 ‘언어가 행위를 이끈다’라는 생각을 사회적, 문화적 학습을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체화하고 살아온 것이다. 언어는 현실을 바꾸기보다, 행동할 나를 먼저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언어에 이끌리는 존재인 것 인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과 존재가 드러나기 어려운 것일까. 이에 대한 반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언어의 부재가 주는 깨달음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는《The Artist Is Present》라는 퍼포먼스 아트를 선보였다. 하루 약 7시간,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관객과 아무런 행위 없이, 어떠한 언어도 주고받지 않고 관객과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영상 속에 담긴 마리나를 마주한 관객들의 모습은 경이롭고 뜨거운 인간의 모습 그 자체였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묘한 감격과 잃어버린 것을 찾은 듯한 충만한 눈빛, 깊은 깨달음을 절제하려는 미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물음은 ‘언어의 작동이 부재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통해 서로를 마주하는가.’ 이다.

사진 출처: 뉴욕 현대미술관(MoMA) 공식 아카이브,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The Artist Is Present》(2010)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그동안 우리가 자신과 세계를 ‘인식의 틀’안에서 이해해온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존재자들은 고정된 본질을 지닌 대상으로서가 아닌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인데, 언어는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존재의 집’인 동시에,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개념적 언어들은 오히려 이러한 ‘드러남’을 가려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마리나의 퍼포먼스는 하이데거가 말한 이러한 지점을 느끼게 해준다. 언어가 사라져서가 아닌,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화된 언어’가 개입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여 상대를 개념화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상대를 해석하거나 규정하지 않고, 서로의 존재적 드러남을 받아들이게 되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니까.

우리는 언어를 더욱 많이 사용하는 존재이지만, 때론 언어가 개입되지 않는 순간에 더 깊이 깨닫기도 한다.


언어에 대한 사유

처음 운전대를 잡자마자 고속도로에 진입했을 때의 나는 설렘 보다는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주문을 걸고 다녔던 것 같다.

‘정신 똑바로 차려’, ‘괜찮아 안 죽어’, ‘나 우리 아버지 딸이야’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 처럼, 끝없는 자기 언어를 종알거렸고, 이때 사용된 대부분의 언어들은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라도 된 듯한 비장한 단어들이 대부분이었다. 만약 가벼운 접촉 사고라도 났었다면, 나의 블랙박스 속 음성 분석을 하게 된 보험사 조사관은 꽤나 즐거웠을 것이다.

인간의 한계 상황인 ‘죽음’, 나라는 존재의 뿌리인 ‘누군가의 딸’이라는 단어는 강하고 자신감 있는 단어로 느껴지지만, 역설적으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을 넘어서는 인간의 행위를 격려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장엄하거나 유려한 연설, 은유적 언어들의 대부분이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나, 큰 질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발화는 곧 행위를 포함한다.’는 J. L. 오스틴의 말처럼, 또 고대 그리스의 납판 저주 문화처럼 언어는 곧 우리의 행위 자체인지도 모른다.


풍부한 의미를 지닌 단어들은 대개 자체 모순을 품고 있다


‘풍부한 의미를 지닌 단어들은 대개 자체 모순을 품고 있다’ 라는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생각을 너무도 사랑한다. ‘아름다움’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노력해서 습득해야 하는 것’인 의미를 품고 있는 것처럼, ‘자유’라는 단어 역시 우리를 하나의 ‘주체’로 만들어 주지만, 동시에 ‘불안’ 속에 던져 놓기도 하는 모순을 품기도 한다.

언어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규정하는 것일까? 우리는 언어라는 축복을 누리되,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존재적 사유를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집’으로서의 언어를 사용하려면 우리는 끝없이 사유해야 한다.

나를 둘러싼 단어와 은유들의 아름다움 또, 그것들의 양면성을 알고 끊임없이 사유하는 사람은 그 자체 너무도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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