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소음에 묻히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시간인 침묵을 가져보세요.
"침묵하지 말아라. 멍하니 있지 말고 뭐라도 해라". "당신은 조용하고 침묵을 많이 하는 걸 보니 내향적인가 봐요?" 우리가 평소에 많이 듣는 말이다.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는 침묵이 마치 잘못된 것처럼 들 말한다. 침묵(沈黙)은 한자어로 '가라앉다, 깊이 잠기다'의 '침'과 '조용하다. 말이 없다'는 '묵'이 합쳐진 말이다. 침묵한다 하면, 말없이 가라앉는 느낌의 부정적인 뉘앙스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으며, 현대와 같은 정보과잉, 외향성 인간(E형)의 시대에 침묵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하지만, 과거 침묵은 군자의 덕목이었으며, 선불교에서는 묵언 수행과 같이 인간이 성장하면서 지켜야 할 중요한 미덕으로 다루어졌다. 현대에도 이러한 침묵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침묵을 두려워하는 이유에 대해 먼저 솔직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침묵은 적막하다. 갖가지 생각이 몰려오기도 하고 주변의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기도 한다. 침묵이 두려운 지점은 여기다. 불확실한 무언가가 오고 있으며 나의 통제를 넘어선 주변이 커진다는 두려움이다. 이런 두려움은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부정적인 생각 자체가 주는 두려움이다. 침묵의 시간 동안 우리에게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기억, 상실한 것, 과거의 실패에 대한 기억과 생각들이 찾아온다. 미래 일어나지 않을 걱정들도 찾아온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부정적 생각들이다. 얼마 전 떠나보낸 어머니, 어제 직장에서의 실수 등 많은 생각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오롯이 직면하고 함께해 나가는 법을 배우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침묵보다 소란을 택하는 것일지 모른다.
다음으로, 침묵하는 시간을 마치 놀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발생하는 두려움이다. 침묵의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無爲),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無思惟) 시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현대인은 어릴 적부터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가르침을 쉼 없이 받아와 일생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처해 있다. 한병철은 이런 현대사회를 자기 계발에 피로해진 '피로사회'라고 했을 정도다. 그런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는 침묵을 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작 나 자신을 대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친근하게 접근하는 방법을 모른다. 침묵하는 동안 나는 타인이 아닌 오직 내면의 나와만 함께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에게는 친절하지만 나에게는 가혹하다.(물론 내로남불도 있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는 측면이 강하다.) 오죽하면 '자기 연민'이니 자신에게 조언할 때 친한 친구에게 조언하듯이 하라는 격언까지 있겠나. 나랑만 함께 있는 시간은 마치 회장님과 단둘이 밥을 먹는 것과 같은 어색함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두려움은 오해와 상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다. 생각은 흘러가는 구름과 같다는 것, 침묵은 가만히 있는 시간만은 아니라는 것, 나 자신과 있는 시간이 곧 내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 기회라는 점에서 침묵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침묵을 통해서만 내 머릿속 생각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마음 챙김 명상, 선불교 등에서 생각은 흘러가는 구름과 같다고들 하였다. 오랜 기간 고요의 침묵 속에서 찾아낸 지혜인 것이다. 나는 요즘 아침에 되도록이면 짧게나마 명상을 하려고 한다. 마음 챙김 명상의 방법으로 '호흡'에 집중하고 나를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한다. 갖가지 생각들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오늘 은행 가서 볼 업무라던지, 상사에게 언제 보고서를 들고 가야 무사히 하루가 지나갈지, 어제 와이프랑 다툰 것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등등 짧은 명상의 시간 동안에도 갖가지 생각이 나를 찾아온다. 명상은 이런 생각들을 멀리 하고 없애는 시간이 아니다. 언제나 생각들이 나를 찾아오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침묵의 시간이다.
생각의 양 떼는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럴 때 그 양 떼 가운데서 하나하나 정리하려고 하면 나 자신마저 혼란스러워진다. 그때, 조금 떨어져서 양 떼를 바라보면서 내 양들의 움직임과 건강상태를 지켜보는 시간, 그 시간이 바로 침묵이다. 물론 양들을 어떻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양 떼가 그렇게 있음을 알아차리고, 내가 휩쓸리지 않기 위해 양 떼와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시간이다. 부정적 생각의 양 떼는 계속 나를 찾아오고 내 주변을 어지럽게 다니겠지만, 내가 그 양 떼에 속해 있고 정신없이 같이 쓸려내려 갈 때만 내게 해를 끼칠 수 있다.
다음으로, 침묵을 통해서만 새로운 것이 탄생할 수 있다. 현대는 정보과잉시대라고 한다. 갖가지 정보를 가진 문서와 영상들이 우리 주변을 돌아다닌다. 과거의 나는 모든 것을 흡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24시간 내내 정보제공 성격의 유튜브나 팟캐스트를 귀에 꽂고 다녔던 적이 있다. 지식과 정보의 양은 늘어났으나, 삶이 변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멋있어 보이는 남의 말을 얘기하는 앵무새 같다고나 할까.
나름대로 내가 찾은 해법은 가끔은 침묵해 보는 것이었다. 그냥 멍하니 있는 침묵은 아니다. 빈 종이, 빈 화면을 두고 내 생각을 자유로이 펼쳐 보거나,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을 찾는 조용한 시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침묵을 통해서 내 안에 자유롭게 떠오르고 융합하는 지혜를 고정하고 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간을 보내야만 나의 삶을 바꾸고 남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즉, 침묵은 가만히 있는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태어나기 위한 고요함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나 자신과만 있는 것이 곧 내 인생이기에 침묵은 결국 익숙해져야 할 숙제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면서도 고독한 존재이기도 하다. 소통과 자립이 함께 해야 나와 남을 모두 사랑할 수 있다. 이러기 위해서는. 나와 단둘이 있는 시간에 익숙해지고, 나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야 한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타인과 대등하게 공존할 수 있도록 내가 오롯이 서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침묵을 피해 다닌다. 그 결과 우리는 《침묵을 배우는 시간》에서 코르넬리아 토프가 얘기하듯이 '우리는 자신을 잃었다. (욕망, 정체성, 영혼 등) 그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건 그저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다는 것, 스트레스가 심하고 온 세상이 불만스럽다는 것뿐이다.' 내 버킷리스트를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것으로 채우지 못하고 타인의 가치관을 좇는 삶이 되어 버렸다.
나와 단둘이 있고, 나에게만 집중하기 위해 최근 조깅을 시작했다. 건강을 챙겨보자고 달리는 것이지만 정신적인 휴식의 효과도 톡톡하게 거두고 있다. 조깅하면서 고요한 주변과 내 신체에만 오롯이 집중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익숙해지면 나의 내면과 영혼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산책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팟캐스트를 귀에 꽂고 쉴 새 없이 외부의 자극을 좇았던 적이 있기에 지금의 아침은 너무 고요하다. 아침의 고요함, 나의 발소리와 숨소리, 주변을 노니는 새들과 길고양이들의 울음소리를 느끼면서 말이다. 티브이·라디오 이후 인터넷과 스마트폰까지 계속 우리에게 정보와 잡음의 신호를 보내는 문명과 잠시나마 떨어져 있는 시간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나 자신과 조금은 더 친해지지 않을까?
침묵은 나태와 게으름, 무지라는 이유로 죄악시해야 하는 시간이 아니다.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시간이며, 특히 열심히 사는 현대인에게 정말 필요한 시간이다. 군자의 덕목이던 침묵이 현대인에게는 일상의 필수가 되어버린 시대가 아닐지. 하루 어느 때도 좋다, 10분 아니 1분이라도 괜찮다. 모든 것을 끊고 잠깐만 고요하게 심호흡을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