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에 진심인 사람의 음식 이야기
ㄱㄴㄷ음식예찬의 ㄴ 은 냉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코로나 시대의 마스크 속에서 숨 쉬기는 더욱 힘들다.
요 근래에 끊임없이 속까지 시원해지는 찬 음식을 찾게 된다.
이열치열이라 하지만 이 더위에 시원한 음식이 땡기는건 어쩔 수 없다.
여름 별미인 콩국수, 주황색 살얼음 양념에 각종 야채와 회를 살살 비벼 먹는 물회, 살얼음 동동 띄워 나오는 메밀국수, 그리고 무엇보다도 냉면!!
요즘의 대세는 평양냉면이라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함흥냉면이 좋다.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아직 먹어보기 전이라 그럴 수도 있고, 무엇보다 씹는 식감이 꼬돌꼬돌한 함흥냉면의 면발을 좋아해서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냉면이 제각각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맛있는 함흥냉면은 다음과 같다.
면발은 너무 질겨서도, 너무 툭툭 끊어져서도 안된다. 이로 끊어내지 못할 정도로 질기면 먹기도 불편하고 소화도 잘 안 되는 듯한 느낌이다. 적당히 질깃하면서 이로 끊어 낼 수 있는 정도가 딱 좋다.
면발의 굵기는 아주아주 얇은 것이 좋다. 조금만 두꺼워져도 질기면 안 끊어지고, 안 질기면 툭툭 끊긴다. 면발이 아주 가늘어야 질기더라고 이로 끊어지는 딱 그 정도의 면발이 나온다.
물론, 익힘 정도도 중요하다. 면을 삶은 후 찬물에 헹궈내고 면발을 쫄깃하게 하기 위해 얼음물에 또 헹군다. 차가워지면서 면이 탱탱해지기 때문에 너무 덜 삶아도 안되고, 조금만 오래 삶아도 곤죽이 된다.
비빔냉면과 물냉면 중에 고르라고 한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비빔냉면이었는데, 요 근래에는 입맛이 바뀌는지 가끔 물냉면도 먹는다. 비빔냉면을 고른다면 양념은 달큰한 맛이 감도는 매콤한 맛이어야 하며, 새콤함과 알싸함은 식초와 겨자로 조절해야 한다. 식초는 대체로 한 바퀴 둘러 넣고 간을 보면서 추가하고, 겨자는 냉면집마다 농도가 달라서 잘 봐가면서 넣는다.
고명으로는 퍽퍽하지 않은 얇게 썰어낸 고기와, 무절임 그리고 소금에 살짝 절여서 꼭 짜낸 오이가 올라간 것을 좋아한다. 아, 열무냉면도 빼놓을 수 없지.
계란은 완숙이지만 너무 익혀 노른자 겉면에 초록색이 감돌면 안 된다. 샛노란 노른자 색만 예쁘게 나오는 것이 좋다.
비빔냉면은 은색 주전자에 나오는 뜨끈한 육수와 함께 먹는 게 좋다. 매콤한 양념의 냉면을 한 입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킨 후 뜨끈한 육수로 입을 달래준다. 처음 한 모금 마시면 매운맛이 더 부각되는 느낌이지만 몇 번 더 마시면 매운맛이 사그라든다.
그리고 차가운 매운맛과 뜨거운 육수의 조화에 만족스러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물냉면의 경우는 육수가 관건이다. 너무 간간하지도 또 너무 싱거워도 안된다. 일단 냉면을 받으면 국물 맛을 본다. 집집마다 쓰는 육수도 다르고 간도 제각각이라 맛을 보고 간을 해줘야 한다. 국물이 차가워지면 양념 맛이 가려지는 현상이 있어서 식초는 한 바퀴 반에서 두 바퀴, 겨자도 농도에 따라 다르지만 단연 비빔냉면 먹을 때보다 많이 둘러줘야 한다. 나는 물냉면을 먹을 때 무절임을 한가득 더 얹어서 먹는다.
냉면집에서는 의례히 가위가 나온다. 면발이 질겨서 잘라먹으라는 의미인데 이것 역시 사람마다 취향이 갈린다. 한 번만 자르는 사람, 두 번 자르는 사람, 그리고 용감하게도 자르지 않는 사람까지... 나는 위쪽에 올라온 고명을 한쪽으로 치워 두고 면만 딱 한번 자르는 사람이다.
냉면은 종류도 참 다양하다. 한 때 유행처럼 번졌던 육수와 비빔장이 함께 올라가 있는 새까만 면발의 칡냉면, 육전을 올려 먹는 진주 냉면, 곁들여 나오는 깔끔한 육수 맛이 일품인 속초 코다리 냉면,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함흥냉면과 평양냉면까지.
남편은 냉면에 올라가는 계란 반개의 노른자를 쏙 빼먹고 노른자의 빈자리에다가 마지막 남은 냉면 자투리들을 모아서 채운 후 한입에 왕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먹고 나면 비로소 냉면 한 그릇을 완전히 비웠다는 쾌감이 있다나?
언젠가부터 나도 삶은 계란이 올라가는 국수류는 남편처럼 먹는 버릇이 생겼다.
가장 기억에 남는 냉면이 있다면 농심에서 나온 "둥지냉면"이다. 줄 서서 먹는다는 어느 유명 냉면집도 아니고 둥지냉면이라니?
남편과 나는 미국에서 더운 남부 지방에 살았는데, 여름이면 두부로 간편하게 만들어 먹는 콩국수부터, 귀한 열무김치가 들어간 열무 국수, 팔도 비빔면, 그리고 한국 식품점에서 파는 냉동 냉면을 사다가 먹었다. 양념까지 깔끔하게 다 들어 있는 채로 파는 간편 조리식 냉면은 바다 건너오면서 가격이 많이 비쌌고, 냉동실에서 면만 파는 냉면은 비빔장을 아주 맛있게 만들어야 했는데, 내가 만들면 뭔가 그 맛이 안 났다. 그러다가 어느 해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둥지냉면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물냉면도, 비빔냉면도 입맛에 딱 맞았다. 면도 아주 얇은 딱 내가 좋아하는 면발이었고, 양념 맛도, 육수 간도 적당했다. 실온 보관이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미국으로 들어갈 때 가방이 허락하는 한 둥지냉면을 꽉꽉 채워서 가지고 돌아갔다. 한국에 있는 동안은 맛있는 냉면집이 많으니 주로 밖에서 사 먹었고, 둥지 냉면은 엄마가 끓여주시는걸 한두 번 먹어보고는 쟁여가지고 미국에 돌아왔다. 미국에 돌아와서 처음 끓인 둥지 냉면은 떡도 아닌 것이 죽도 아닌 것이 아무튼 무참히 실패했다.
라면처럼 면을 넣어 놓고 풀어지길 기다린 것이 문제였다. 둥지 냉면은 물에 닿자마자 면발을 살살 풀어내면서 젓가락으로 눋지 않게 열심히 저어줘야 한다. 잘 끓어 넘치는 데다가 조금만 많이 끓이면 바로 곤죽이 되어서 자리를 절대 뜰 수 없다. 그렇게 매의 눈으로 익힘 정도를 판별해서 찬물에 헹구고 얼음물에 담갔다가 미리 만들어 놓은 육수나 혹은 비빔장을 올려 먹는다. 그 해 여름은 둥지 냉면으로 냉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살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사는 동네의 한인마트에도 둥지냉면이 (꽤 비싼 가격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 냉면은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그래도 미국에서 라면처럼 끓여 먹을 수 있는 냉면이라는 참신함에, 그 더운 날들에 얼음 몇 개 띄운 냉면과 함께 할 수 있었음에 기억에 오래 남는다.
냉면은 옛날 조선시대에 한 겨울에 육수를 얼려 만들어 먹던 것이 시초라고 한다.
원래는 겨울 음식이라고 하지만, 역시 냉면은 여름이지.
더위가 한풀 꺾이기 전에 조만간 냉면 한 그릇 먹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