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아도취 Jul 28. 2021

[ㄱㄴㄷ음식예찬]가지가 가지가지하네

먹는 것에 진심인 사람의 음식 이야기

블로그에서 몇 달 전부터 미니 프로젝트 삼아 알파벳 시리즈를 쓰고 있다.

알파벳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그날 떠오르는 단어를 정하고, 그것에 대해 글을 하나 발행을 한다.

B is for Baking 이라거나 M is for Memories 뭐 이런 식이다.

브런치에도 비슷한 시리즈를 하고 싶었는데, 알파벳이 아닌 한글 자음으로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왠지 '브런치 작가로서' 각 잡고 앉아서 써야 하는 브런치 글이니만큼 주제를 정했다.

언제나 할 말이 많은, 내가 사랑하는 먹는 이야기로 말이다.




ㄱ으로 시작하는 음식으로는 "가지"를 떠올렸다.

가지 하면 어릴 적 여름이면 밥상에 올라오던 물컹거리고 거무튀튀한 색의 가지 나물이 떠오른다.

밥상에 올라오는 다른 음식에서는 볼 수 없는 거무죽죽한 회색 빛깔의 가지나물.

비빔밥 먹을 때에나 겨우 넣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뭉개 버리고 나서야 조금 먹을만했던.

엄마의 맛깔난 양념 맛으로 먹긴 했으나, 가지나물 자체에 대한 호불호는 딱히 없었다.

그냥 무나물처럼 별 맛은 없고 양념 맛으로 먹는 비빔밥에 들어가는 음식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러다가 미국 유학을 갔고, 그곳 마트에서 "미국 가지"를 처음 만난 십수 년 전의 어느 날을 아직 기억한다.

외형이 오이를 닮아 가느다랗고 길쭉한 한국 가지와 달리 미국 가지는 조선무 정도의 두께와 땅딸막함을 자랑했다. 한국에서 보던 가지를 다섯 개쯤 합쳐야 미국 가지 하나의 두께가 나올 것 같았다.

"미국은 가지도 덩치가 크구나"란 생각을 하며 "이건 어떻게 요리를 해 먹는 걸까?" 궁금했다.


이미지 출처: unsplash.com


처음 미국 가지를 맛보게 된 것은 어느 이탈리안 식당에서였다.

나는 만만해 보이는 파스타를 시켰는데 함께 간 친구가 "eggplant parmesan"이라는 음식을 시키는 거다.

뭔가 라자냐 비스무리하게 켜켜이 쌓인 빵가루를 입고 구워진 가지 사이에 치즈와 토마토소스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건 무슨 맛이니?"라고 물어보자 친구는 맛을 보라며 흔쾌히 한 조각을 잘라서 내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조심스레 먹어본 미국 가지는 빵가루 묻혀서 기름에 튀긴 느끼한 고소함과 따끈하고 새콤한 토마토소스 그리고 쭉쭉 늘어날 정도로 녹진한 모짜렐라 치즈의 쓰리 콤보로 내 혀를 강타했다.

동공 지진을 일으키면서 "너무 맛있다!!"라고 하자 친구가 웃으며 자기의 최애 이탈리안 요리라고 얘기해줬다. 그 이후로 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면 종종 eggplant parmesan을 시켜 먹곤 했다.

이미지 출처: thecozycook.com

Eggplant parmesan을 먹게 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마트에서는 미국 가지에 손이 안 갔다.

그러던 어느 날 S 언니의 손에 이끌려서 가게 된 일식집에서 nasu shigiyaki라는 요리를 먹어보게 되었다. Eggplant 어쩌고 라고 쓰여 있길래 나는 주문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S 언니의 강력 추천으로 어쩔 수 없이 주문을 했다. 도톰하고 동그랗게 자른 가지 위에 미소 된장으로 양념한 다진 고기가 올라간 요리였다.

미소 된장 양념 고기는 단짠단짠에 적당히 기름졌고, 그 아래를 받치고 있는 가지는 양념을 한껏 머금고 있다가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육즙 터지듯이 양념을 쏟아냈다. 조금 센 양념의 고명과 부드러운 맛의 가지는 천상의 조합이었다.

그 당시 차가 없던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그 일식당에 자주 갈 수가 없었는데, (물론 가난한 유학생의 주머니 사정도 한몫했다) 어쨌거나 갈 때마다 그 가지 요리는 빠지지 않고 반드시 시켰다.


이미지 출처: inquirer.com


나중에 그 동네를 떠나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그 요리를 재현해 보고자 마트에서 "미국 가지"를 샀다. 내가 원하는 딱 그 레시피는 없어서 이것저것 레시피들을 조합해서 만들어 보기로 했다.

통통하고 반질반질한 가지를 뽀드득뽀드득 씻었다. 도톰한 크기로 동그란 접시처럼 가지를 썰어냈다.

미국 가지는 가운데가 스펀지 같이 말랑해서 칼이 뽀도독 소리를 내며 들어갔다.

자른 가지를 펼쳐 놓고, 소금을 살짝 뿌려서 밑 준비를 한 후, 고명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명을 얹은 가지를 오븐에 넣고 구웠다. 치즈를 올리고 싶었으나 참았다.

뜨거운 요리를 후후 불며 한 입 먹어 보니, 그때 그 식당에서 먹었던 그 맛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미국 가지"를 사서 요리해 보았다는 성취감은 남아 있다.


가지 맛에 눈을 뜨게 된 나는 식당에서 만나는 가지 요리들을 하나둘씩 주문해 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가지 요리들로는 미국의 이탈리안 식당에서 주문했던 eggplant rollatini 가 있다.

얇고 길게 슬라이스 한 가지에 리코타 치즈를 얹어서 김밥처럼 돌돌 말고, 오븐용 그릇에 가지런히 놓은 후 그 위에 토마토소스를 얹어서 구워 낸 음식이다. 크리미 한 리코타 치즈가 가득 들어 있는 가지에 짭짤 새콤한 토마토소스와 때에 따라서는 파마산이나 모짜렐라 치즈를 얹어 오븐에 구운 음식이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Baba ganoush라는 야채나 빵 등을 찍어 먹을 수 있는 가지로 만든 지중해식 딥도 색다르지만 인상적인 맛이었다. 굉장히 크리미 한 hummus 같은 맛인데,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가지로 만들었다고 전혀 생각지 못할 맛이다.


이미지 출처: www.seriouseats.com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은 가지의 물컹한 식감을 싫어하는 "가지 불호족"이었다.

남편에게도 가지를 재발견하는 기쁨을 알려주고자 다방면으로 노력을 했는데, 어머님께서 어느 날 구운 가지나물을 해주신 게 도움이 되었다.

가지를 보통은 쪄서 나물을 하는데, 작은 어머님께 전수받은 비법이라며 가지를 프라이팬에 구워서 수분을 조금 날려준 뒤 갖은양념을 해서 상 위에 올리셨다. 내가 그때까지 먹어본 가지나물 중에 제일 맛있었다.

남편도 "이건 (물컹거리지 않아서) 좀 먹을만하네."라며 젓가락을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그 뒤로 나도 두어 번 그 방법으로 가지나물을 만들어 보았으나 어머님이 해주신 맛이 안 나서 그만두었다.


즐겨 가는 딤섬 집에서는 가지 안에 다진 새우로 소를 만들어서 구운 가지 딤섬이 있는데, 이 요리는 남편도 아이도 잘 먹어서 우리 가족의 최애 가지 메뉴가 되었다. 아이는 아무래도 가지 딤섬 위에 뿌려주는 달콤 짭짤한 갈색 소스 맛으로 먹는 것 같지만 뭐 어떠랴. 요즘도 가끔 "가지 먹으러 가고 싶다"라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성공.


이미지 출처: dimdimsum.modoo.at


부모님의 전원주택에 가서 바비큐를 해먹을 때면 짙은 보라색으로 잘 익은 가지도 그릴에 올린다.

고기 굽고 남은 열로 구워낸 그릴 자국이 선명한 가지는 그냥 먹어도 맛있고, 미트소스를 곁들여 먹으면 근사한 요리가 되고, 궁할 때는 대파와 고추를 쫑쫑 썰어 넣은 간장 양념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다.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가지 요리는 어향가지인데, 늘 마파두부만 해 먹다가 어느 날 집에 가지가 있어서 가지를 넣고 해 보았더니 엄청 맛있는 밥도둑이 되었다. 나는 재료를 준비해서 볶기만 하면 마법의 소스 두반장이 열일을 해서 어떻게 해도 실패가 거의 없다.


이젠 여름 하면 떠올리는 채소 중에 가지를 빼놓을 수가 없다. 여전히 가지 요리는 내게는 어렵지만 여름이 되면 늘 먹고 싶은 채소이다. 올여름이 지나가기 전에 나는 또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검색하며 색다른 방법으로 가지를 먹어볼 궁리를 할 것이다. 가지는 알면 알수록 가지가지하는 채소이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