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년 4월 5일은 ‘식목일’이다.
나무를 심고 아껴 가꾸도록 권장하는 날이다.
그 날만큼은 단순한 식물로서가 아니라 생명과 자연의 상징으로서의 ‘나무’를 존중하는 날이다.
2025년 4월 5일.
2025년 2월 16일에 하늘로 떠난 김새론의 49재다.
49재도 지나지 않은 이 마당에 언론은 김새론과 김수현의 스캔들 기사를 대중들에게 사고 팔고 난리가 아니다. 물론 그 정보 출처의 상당수가 유족인 것 같고 유족의 깊은 뜻이 잘 헤아려 지지는 않지만(유족들 사이에서도 당연히 입장 차이가 첨예할 것이다.) 이 기시감(언론의 익숙한 광풍)이 정치 부재의 계절과 깊이 맞물려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건 어쩔 수가 없다.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의 선고일을 청구인과 피청구인 양측에 고지하지 않으면서 최종 결론이 다음 주로 미뤄졌다.
2024년 12월 3일 계엄의 밤.
나는 세무서 두 명의 귀인들과 영등포구 '당산원조곱창'에서 12년만에 해후하여 술을 마셨고 오랜만의 반가움에 고양 되어 익숙한 상태가 되었다. 필름이 끊긴 채 집에 와서 더듬거리다 보니 새벽 5시경이었다. 카톡창을 열었더니 시뻘시뻘이다.
계엄? 계암? 계엄???
44년 전 전두환의 계엄으로 나의 아버지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뱃가죽을 인두로 지짐 당했다. 여러 무참한 고문의 여파로 인해 아버지는 루게릭병에 걸렸고 69세의 나이로 내 곁을 떠났다. 배에 있던 그 긴(15센치 정도) 흔적을 아버지는 최대한 보여주려 하지 않으셨다.
'엄청 무서웠겠다. 너무 아팠겠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 상처를 볼 때마다 생각했던 바이다. 내가 더 보려 하면 화를 내셨다.
정치는 가십을 먹고 자란다.
‘가십’은 개인의 사생활에 대하여 소문이나 험담 따위를 흥미 본위로 다룬 기사이다.
정치 권력은 연예인의 가십을 이용한다. 정치가 막히면 연예계로 불똥이 튄다.
이명박의 BBK 관련 기사가 뜬지 3분 뒤에 서태지와 이지아 기사가 떴고 'BBK 사건에 대한 진술이 거짓이었다는 김경준의 고백 기사'는 뒤로 점점 밀려나게 되었다.
이런 그 때. 이선균이 등장했고, 저런 그 때. 정우성이 등장했다.
모두 시의 적절한 '시비 적절' 기사였고 누군가는 죽거나 상병신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대중에게 '포장된 이미지'를 팔아 먹고 그들의 '섣부른 반응'을 먹고 산다는 점에서 정치인과 연예인은 비슷한 직업이다. 그들은 유독 '측근'이 너무 많다.
정치덮밥을 덮고 있는 연예 후라이.
대중들은 후라이에 섞은 청양 고추의 매운 맛에 기만 당하여 덮밥의 썩은 내를 간과하기 일쑤다.
가십이 고상의 척도에서 홀대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재생산 재소비 되는 것은 사람들의 정치 무관심과 엿보기 욕구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대중의 무관심을 바란다. 그래야 더 마음대로 해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마치 벼슬인 것처럼 장착하고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수록 그네들의 부패 지수는 올라가게 되어 있다.
숱한 죽음 앞에 언론은 죄의식 측면에서 자유롭게 행동한다. 거대 공동정범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휘성의 죽음'보다 '김새론의 죽음'이 아직도 더 싱싱한 재료인가 보다.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 어떻게든 ‘발은 걸쳐야 하는’ 언론의 조급증이 ‘뭐든 쓰고 보자’ 식의 보도를 무한 반복 재생산 하고 있다. 정보 격차가 해소되면서 누구에게나 정보 접근이 용이해져 기자 정신은 '돈' 앞에 침몰한지 오래다.
기사 내용의 정확성이나 사실 관계의 골밀도에는 관심이 없다. 기자와 카피라이터의 경계가 모호하다.
오늘 일기 글감은 어제 아침 마늘의 한 마디였다.
"오빠 김수현이 걱정 돼. 김수현이 잘 했다는건 아니야."
방법은 개개인의 ‘각성’ 밖에 없다. 정치와 언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보호를 위해서라도 음모론에 취하기 십상이고 여기에는 오랫동안 습관화된 자괴감도 섞여 있다.
개개인으로 구성된 집단은 이성과 자기 극복 능력,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능력이 훨씬 결여되어 있어 개인에 비해 심각한 이기주의가 발현된다.
개인의 이기적 충동은 개별적일 때보다 공통된 충동으로 결합되어 나타날 때 더욱 생생하게 표출된다. 그럴 때 우리는 정치가 필요하다.
개인과 개인의 사이에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조정 과정을 통해 관계의 표준이 갱신되는 반면, 집단들 간의 관계는 윤리적인 면보다 상호 간의 힘의 비율에 따라 정립되는 바가 크다. 그럴 때 제대로 작동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수 십년 간 국민을 갈라치기 하고 증오와 반목을 밑밥 삼아 자기네 덕지한 배때기 둘레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그들에게서 이제 좀 그만 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각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김수현에 대한 이 조리 돌림은 심심한 애도의 근처인가? 아니면 양심적 보도의 근처인가?
'자살'이라고 칭해지는 죽음들은 안타깝다.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은 과연 '자살'일까? '타살'일까?
우리는 아프더라도 가끔은 그 아픔 속에 머물러 나를 조용히 그대로 유지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