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간곡함에 할아버지는 못 이기는 척 서울 진출을 허락하셨다.
아버지는 전기는 중앙대 약대 시험을 치렀다. 면접 때 장기가 뭐냐고 묻기에 노래를 부르셨다고 한다.
큰손자를 약대에 보내야 한다는 증조할아버지의 유언이 있었다고 하니 노름으로 집안을 말아 드셨지만 생에 대한 미련은 강하셨나 보다.
중앙대 약대에 합격은 했지만 등록 하지 않았고, 후기인 한양공대 섬유공학과에 응시해 합격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섬유공학과를 지망한 까닭은 무슨 포부가 있었던 게 아니라 아버지가 양복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업을 잇겠다는 생각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학교를 다닌지 1주일이 채 못 돼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서 상록학원에서 재수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한양대를 다니고 있는 줄로 알고 계셨단다. 그 시절 삼선교 부근에서 서울대 약대 다니는 1년 선배와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느닷 없는 할아버지의 방문으로 재수하는 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고 한다. 태어나서 처음 해본 거짓말이라 하셨다.
얼마나 다니기 싫었으면 거짓말을 하셨을까?
나도 환경공학과에 들어가서 전공 과목(환경공학개론 등)을 듣고 첫 달에 나랑 안 맞음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나 엄마나 형이나 나나 그냥 딱 '문과' 체질이다.
아버지는 내 성장기에 손찌검을 하신 적이 거의 없다. 딱 두 번 있다.
한 번은 7살 때 아버지가 술이 거나하게 취해 들어 왔는데 내가 운동 하는 것이 힘들어 엄마한테 짜증을 부렸나보다. 아버지는 그냥 나를 던져 버리셨단다. 장롱 모서리에 정수리가 찍혀 피투성이가 되었고 그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날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덕분에 차크라 명상에 특화된 몸이 되었다.
또 한 번은 12살 때 학교 문제집을 산다고 엄마한테 돈을 받아간 게 '거짓말'이었음을 들켰을 때다. 굵은 나무 회초리로 때리다가 분기가 폭발해 곤죽이 되도록 나를 패버리셨다. 엄마가 무릎을 꿇고 빌어서야 불을 끌 수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 평소대로 집에 들어오지 마세요.'
내가 질퍽해진 이유는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거짓말이 들통 났던 순간 할아버지한테 어떻게 되었을까?' 가 제일 궁금한데 기록이 없다.
아버지는 재수할 때 율산그룹 신선호의 형 신춘호 집에서 숙식을 했는데 당시 신춘호는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에 재학 중이었고 그의 부모님은 독실한 침례교 장로와 집사였다. 또한 중3이던 신선호는 경기고 입시를 준비 중이었다고 한다.
다음해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를 지망해 실패한 아버지는 급기야 성균관대 약대에 합격했다는 거짓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역시 거짓말은 시작이 어렵지 그 다음은 가장 쉬운 방편이다.
재수도 용납 하지 않던 할아버지께 3수에 대해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거짓말도 늘어 이번에는 등록금까지 타내 음대 성악과를 가려고 레슨을 받으러 다니다 들통이 나고 말았다고 한다.
음대 성악과를 지원하겠다는 말에 할아버지의 분노는 이만저만한게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잘 없다고 했던가. 마침내 할아버지는 음대만 안 가면 어디든 좋다는 말씀을 하셨단다. 그리고 경제 지원 봉쇄 조치를 내리셨다고 한다.
결국 두어 달 버티다가 낙향한 아버지는 친척이 경영하는 대림옥이라는 음식점의 툇마루에 상을 펴놓고 입시 공부를 다시 시작하셨다. 대림옥은 일급 음식점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세를 내준 건물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무렵 휴식시간을 이용해 당구를 처음으로 배웠다고 한다. 말이 휴식시간이지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뻔질나게 당구장을 들락거리셨단다.
아버지가 거짓말도 잘 하고 대학교 응시도 여기 저기 시도하고 당구장도 즐겁게 다니셨다는 부분들이 의아하면서도 신통방통 참 재미가 있다. 또한 과 선택을 함에 있어 그래도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려 시도한 것을 보니 장남이긴 하셨구나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중에는 당신 하고 싶은 방향대로 다 하셨지만 말이다.
나의 '입벌구력'의 원동력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 같다. 심지어 그리 싫어하시던 거짓말의 종류가 무척 다양하고 통이 큰 것을 보니 나의 '거짓말력'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맞는 것 하다. 엄마야말로 정말 거짓말을 일절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친근하다. 보고 싶다.
1962년 아버지는 서울대 시험에 도전했다. 그 때 예비시험에 체능시험 제도가 도입되었다. 당시에는 자신의 필기 성적을 미리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전국의 모든 대학이 동일한 시험 문제로 시험을 실시해 학과별로 전국 석차가 발표되었다고 한다. 그 해 문리대 사학과는 정원이 20명이었다. 필기 성적 300점 만점에 체능 성적이 50점으로 합계 350점이 만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