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아버지 4.(서울대 합격)

by 하니오웰
1xiCg0gz3lb.jpg


그 해(1962년) 사학과 필기 커트라인이 300점 만점에 240점이었는데 평소에는 다소 낮았던 사학과의 커트라인이 엄청 높아진 것이었고 아버지의 필기 점수는 226점이었다.


체능 시험은 기본 점수 10점에 100미터 달리기, 턱걸이, 좌우 팔 멀리 던지기, 넓이뛰기 등 다섯 종목에 각각 점수가 배당되어 있었는데 아버지는 필기 커트라인에서 모자라는 점수를 보충하려고 열심히 운동을 했지만 재학생과 달리 아무리 연습을 해도 시간이나 거리를 측정해줄 사람이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혼자서 눈 덮인 모교 운동장에서 3수의 멍에를 벗기 위해 안간힘을 쓰셨다고 한다. 몸은 무겁고 팔이 가늘어 턱걸이를 하지 못해 더욱 애를 태우셨단다. 턱걸이는 아홉 개가 만점이었다.

서울대에 가고자 3수까지 했는데, 이번에 못 들어가면 대학은 아예 가지 말자는 작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했다.

체능 시험에서 아버지는 턱걸이를 일곱 개 하고 나머지 네 종목은 만점을 받았다. 커트라인에 14점이 부족했지만 체능 시험 성적이 좋아 아버지는 결국 합격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체력과 운동 신경이 좋았다.

80년대 불광동 진성 아파트에 살 때 아주 가끔 집에 들어 오실 때면 아파트 공터 벽에 테니스 공을 쉼 없이 튀기다 오셨었고 수 많은 친구분들과 등산을 자주 다니셨는데 형을 항상 데리고 다니셨고 나한테 함께 해주지 못 해 미안하다는 말을 가끔 해주셨다. 나는 참으로 아까웠다. 형은 돌아올 때마다 용돈이 두둑했기 때문이다.

형도 아버지를 닮아 운동 능력이 좋았다.

중학교 때까지 장래 희망은 계속 축구 선수였다. 형은 발재간이 좋고 빠른 주력으로 골을 많이 넣었었는데 형을 유일하게 경탄스럽게 봤던 시절은 그 때 뿐이었다.

아버지는 100미터를 12초 중반, 형은 12초 초반에 끊는 준족이었고 두 양반 모두 다리가 엄청 두꺼웠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시절 나와 형을 불광 중학교로 새벽에 데려가 같이 요이땅을 몇 번 해주신 적이 있었는데 숱한 과음으로 성대와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고 형한테 밀리는 상황이 되면 나한테 되돌아와 보폭을 맞춰 주시곤했다.

아버지는 중앙정보부 요원들한테 쫓길 때 당신의 주력으로 추격의 예봉을 피한 얘기를 자주 하셨다.

"거시기 그렇게 한바탕 뛰고 나서 막걸리 한 잔 하면 허벌나브러"

나는 이 합격 일화를 아버지한테서는 수 차례, 엄마한테는 수 십 차례는 들었었는데 이렇게 기록으로 만나니 더욱 생생한 재미가 있다. 체육을 잘 해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설화였는데 이렇게 텍스트로 보니 명백한 사실이다.


62학번으로 진학해 당시 문리대에 유행하던 진보적인 서적들을 접하면서 아버지는 새로운 친구들과 조우하게 되었고 친구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적이거나 샤프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역사의 획을 긋는 인물의 반열에 오르기까지는 '서울대' 간판이 구비구비 마다 깊이 작용했다고 엄마는 가끔 말씀하셨었다. 두 형제를 견인하려는 잔꾀셨으리라.

내가 밖에서 친구 때문에 상처 받아 고민하고 짜증내는 말을 엄마한테 하면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다.

"니 아빠는 거지부터 대통령까지 안 가리고 친구 맺는 사람이었다. 그냥 한 잔 하면 영원히 친구가 돼. 가르지를 않았다고."

실제로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사당동 친구집에 우리 형제를 자주 데리고 가셨다. 형과 동갑인 '설ㅇ 누나'네 집이었는데 형은 그 누나를 꽤 오래 짝사랑 했었다. 수영장이 딸린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과 경기 지역을 아우르는 유명한 조폭 친구의 집이었다.


전라도 일대 중고등학교 교복 납품을 독점하시던 수완과 재력으로 장남을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에 우겨 넣는데 성공한 나의 할아버지는 아주 통이 크신 분이셨다.

아버지는 재수 시절 형편이 어려운 친구 세 명에게 대학에 합격하면 입학금을 내주겠다는 제의를 하셨다. 그 중 한 친구는 거절했지만, 두 친구는 아버지의 제의를 받아들여 열심히 공부하셨다고 한다.

두 친구는 세브란스 의대와 서울대 상대에 각각 합격했지만, 아버지는 대학입시에 또 실패를 하셨다.

약속을 지킬 요량으로 할머니께 말씀드렸더니, 할머니는 정말 엉뚱한 제안을 하셨단다.

등록금을 반액으로 깍아서 주자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결국 할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께서 아버지를 부르셨고 아버지는 잔뜩 주눅이 들어 할아버지 앞에 다가가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단다.


"남을 도울 때는 말이다. 돕기로 마음 먹었으면 마음을 다해 도와주는 것이고 돕고 나서는 깨끗하게 잊어버려야 되는거야."




keyword
작가의 이전글태교 일기(2014.11.28. 어떻게 죽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