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이 라미인 시절 내가 쓴 태교 일기는 거의 몇 줄에 그치는데 2014년 11월 28일 제법 길게 쓴 태교 일기가 있어 옮겨 본다.
11주 4일 째 라미의 모습.
2주 전에 2.95cm이었는데 4.73cm이 되었네. 1.78 cm가 더 자랐네.
오늘 엄마가 보건 휴가로 쉬는 날이라 아빠 아침을 차려줬어.
빵에다가 당근을 섞은 계란 경단에 딸기잼을 발라줬어.
맛나게 아침을 챙겨 먹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 날에 아빠는 출근했단다.
엄마는 라미의 '기형아 검사(1차)'를 하러 혼자 병원에 가서 이 사진을 보내줬단다.
잘 크고 있음은 물론이고 기형의 징후가 일단 없다고 하여(2차 검사까지 가봐야겠지만) 가슴을 쓸어내렸단다. 아빠는 라미가 혹시 '장애'를 갖고 태어날까봐 악몽까지 꾸는 밤들이 있거든.
점심엔 할머니랑 엄마랑 빕스에 갔어. 할머니는 20년 넘게 빕스 매니아 오브 매니아셔.
아마 너도 좀 나중에 빕스 행렬에 동참하게 될거야
할머니는 오늘도 지지배배, 재잘재잘. 쉼 없는 사자후를 내뿜으셨고 아빠는 지금(오후 2시) 사무실로 컴백해 이 글을 써내리고 있단다.
할머니는 포도주 2잔을 드시고는 불광동 NC 백화점으로 가셨어.
할머니는 집, 도서관을 놔두고 NC 백화점 엘리베이터 옆 간이 의자에서 주무시는 버릇이 요즘 생겼거든.
나중에 만나겠지만 할머니는 정상의 범주를 조금 많이 벗어난 분이야. 엄청 정의롭고 정 많은 사람이긴 하고.
엄마는 작은 이모 집에 갔어. 유ㅇ이랑 유ㅇ이를 보러 간다며 신나는 발걸음으로.
아빠는 저녁에 재ㅇ 삼촌, 명ㅇ. 소ㅇ 이모를 만날 것 같아.
보석 같은 재ㅇ 삼촌이 2005년 서대문 발령 동기들에게 7급 승진 턱을 낸다고 모이는거지.
종각에 있는 '호미관'이라는 이자카야 식 술집에 가기로 했단다.
조금만 마실께. 엄마가 조금 마시라는 명령을 내렸거든.
라미가 든 이후로 엄마 말을 참 잘 듣는 아빠야. 좀처럼 이런 나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어제 아빠는 서울대 정현채 교수의 '죽음학 강의'를 듣고 왔어.
생각 보다 참 좋은 강의였어.
삶을 더 철학적으로 관조적으로 살아내라는 대장암 말기에 들어선 건축가 정기용 님의 영상이 가장 기억에 남네. 일본 드라마 '바람의 가든', '위트', '엔딩 노트', '말하는 건축가' 영화 장면들을 적절히 섞어내 죽음에 들어서는 문을 두드리는 삶을 살아보라는 강의였는데.
'삶'에만 집중하는 우리들에게 '죽음'에도 관심을 두라는 메세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화두 등을 예리하게 던져주었어.
모두에게 똑같은 삶이 없듯이, 똑같은 죽음도 없을 것이잖니?
아빠는 죽음이 그리 두렵지 않았고, 어쩌면 빨리 죽음을 맞고 싶은 정서를 바탕으로 살아왔는데.
어쩌면 구체적으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관조를 담아 살펴본 적은 없는 것이겠지.
라미가 아빠의 인생에 등장한 것은 근본적인, 원초적인 변곡점이 되는 것이란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어떻게 미래를 설계해야 할 것인가? 어떤 아빠가 될 것인가? 등의 질문들이 아빠를 쉼없이 감싸기 시작했거든.
'엄마를 만남'으로써 '사랑의 원형'에 대해서 재정립하게 되었고, 그 엄마와의 사랑을 통해 '라미를 만남'으로써 '장래와 미래'에 대해 '구체적이고 책임 귀속적으로 고민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만나게 되었거든.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아내도록 노력할꺼야.
나의 몫 이상의 몫이 있음을 자주 반추하면서.
아빠의 나아갈 바는.
"질서 있는 간소한 생활을 할 것.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필요하지 않은 일을 멀리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무엇에든 공부에 힘을 쏟고 그 방향성을 지킬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
좀 더 기다리면 너가 내 옆으로 오겠지?
저런 다짐들을 했었구나.
나는 당연히 저런 다짐에 1도 근접 못 하게 살아왔다.
저 다짐을 한지 3764일이 지났다.
다시 새겨볼 말들이고 '귀향'의 마음을 들고 앞으로 나란히 해보겠다.
요즘 숙면의 횟수가 늘고 있다. 결론은 적절한 운동인 것 같기도 하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