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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엄마 1.(엄마의 위 아래, 아픈 손가락들)

by 하니오웰


윗 줄 가장 왼 쪽이 나의 엄마다.


나의 외할머니는 상주 오대에서 큰 외삼촌과 엄마를 낳았다.

외할아버지는 문경 점촌의 '문경중학교'에서 근무하셨는데 외할머니는 혼자 큰 아들과 큰 딸을 키우다가 큰 아들이 너댓살 무렵에 점촌으로 나왔다고 하신다.

큰 외삼촌 손위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생후 7개월 때 죽었다고 한다.

외할머니의 상심은 매우 커서 큰 외삼촌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외할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 했다고 한다. 큰 외삼촌은 순한 성정을 가지고 계셨는데 돌이켜 보면 항상 무언가에 주눅이 들어 있는 느낌이었고 다양한 열등감이 있으셨다.

내 어린 시절부터 가족이 다 모일 때마다 큰 외삼촌은 발화량이 참 많았는데 아무도 제대로 주목해 주지 않았다. 외숙모도 당신 남편을 무시했고 그 자식들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큰 외삼촌은 나한테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셨기에 어릴 때 난 당신을 대하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이해 가지 않았다.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다.

"우리 오빠는 참 불쌍한 사람이다. 다른 어른들한테보다도 더 깎듯하고 크게 인사해야 한다."

엄마는 말씀은 그렇게 하시고 언행불일치의 묘를 잘 살리셨다.

엄마와 외삼촌은 정치적 성향이 대척점이었고 일상의 가치관도 많이 달랐다. 상대의 말꼬리를 잡는 언쟁이 계속 되었는데 세 살 차이 엄마의 으르렁은 잦아들 기세가 없었고 둘의 언쟁이 시작되면 모두 하나 둘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언제나 끝은 "그래 현희 너 잘 났다. 천 년 만 년 너 잘난 맛에 살아라" 식이었다.

국민학교만 졸업한 것이 평생 한이 되었던 외할머니께서는 장남(큰 외삼촌)만은 반드시 서울대에 보내겠다는 일념이 무척 강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홀로 서울로 상경하셔서 외삼촌을 국민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보냈다고 한다. 외삼촌 학교 근처인 혜화동, 명륜동, 답십리로 이사다니며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악착같이 사셨다고 한다. 삯바느질에서 점방까지 하지 않으신 일이 없다고 한다.

큰 외삼촌에 온갖 비싼 과외 선생님을 붙이며 꾸역꾸역 공부를 시켰지만 중앙대 기계공학과에 그친 것이 두고두고 외조부모의 한이 되었고 큰 외삼촌은 또 그것을 석고대죄 할 죄로 여기며 엄한 외할아버지의 눈치를 평생 보고 사셨다고 하니 애잔함이 크지 않을 수 없다.

큰 외삼촌은 외할아버지의 제자가 이사로 있던 건설사에 낙하산으로 들어갔으나 유달리 소심하고 남들 눈치를 심하게 보는 성격 때문에 원만한 인간 관계를 맺지 못 하였고 10년을 못 채우고 사표를 냈다고 한다.

외조부모의 첫 번째 아픈 손가락이었다.


문경 점촌에서는 외할아버지와 엄마, 현숙이 이모 셋이 살았다고 한다.

현숙이 이모는 엄마의 4살 터울 동생이다..

이모는 머리가 비상해서 아이큐가 142가 나와 학교 전체를 통틀어 몇 손가락 안에 들었다고 한다.

담임이 머리가 너무 좋은 것이 걱정 되니 외할아버지한테 집에서 잠을 더 재우라는 말을 했을 정도라고 한다. 나의 외가 엄마의 6남매 중 유일하게 이목구비가 서구식이었고 어릴 때 별명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였다.

취미 부자셨던 외할아버지는 현숙이 이모를 총애하셨다고 한다. 이쁘고 말도 잘 하니 밖으로 사진을 찍으러 나가거나 산에 그림을 그리러 가실 때 항상 옆에 붙여 데리고 다니셨단다.

엄마는 집을 지키라 하고 데리고 다니지 않으셨다고 하니 생각해 보면 장남, 장녀였던 나의 아버지나 엄마는 인물이 좋은 동생들 때문에 차별을 심하게 받았다.


외할아버지는 동아일보를 구독하셨는데 엄마는 국민학교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외롭고 무서워서 그 신문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손에서 떼지 않으셨단다. 그 결과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반에서 선생님 말씀을 알아 먹으며 말대꾸 하는 사람은 엄마 밖에 없었기 때문이란다.

왜 무섭고 외로웠냐고 여쭈니 현숙이 이모는 집에 절대 없었다고 한다. 온 마을의 사랑을 받는 아이였고 하도 빨빨 거리고 여기저기를 다녀 별명이 '빨로꾸이'라고 했는데 네이버를 아무리 뒤져봐도 관련 단어는 찾을 수가 없고 정확한 뜻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이 단어가 과연 맞는가 싶다.

외할아버지가 엄마한테 두부 심부름 등을 시켰을 때 남은 거스름돈을 이모는 자기한테 달라고 했고 엄마가 안 주면 이모는 엄마한테 식칼을 던지며 위협했다고 하니 성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옆 초가집 어르신이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이모는 바로 태세전환 해서 언니한테 아양을 떨었다고 한다. 가족한테만 갖은 포악을 떠는 아주 영악한 년이었다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이모는 다재다능해 국민 학교 때 상이란 상은 다 휩쓸어 대는 부모의 깊은 자랑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현숙이 이모가 중학교 1학년 때 집에 큰 불이 났는데 마침 집에 혼자 있었다고 한다. 그 사건 이후 이모는 악화일로를 걸었다고 한다. 도벽과 심한 폭식증이 생겨서 온갖 패악질을 거듭했다고 한다.

밖으로 나가면 도둑질과 찌그러진 식탐으로 사고를 쳤기에 이후 집 안에서만 가두어 키우셨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 2주에 한 번쯤 언니 집으로만 외출 허락을 받아서 이모는 우리 집으로 놀러 왔었다.

점심을 우리 형제랑 먹던 이모는 꼭 석이 형이 아닌 나한테 물어본다.

"ㅇㅇ야 엄마한테 오늘 저녁은 뭐냐고 몰래 물어봐줘."

나는 그 이모를 좋아했다. 그냥 짠했다. 어릴 때 얘기를 가끔 해주셨는데 내용이 생생했고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보답으로 엄마 몰래 오백 원을 주면 이모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ㅇㅇ야 내가 나중에 돈 생기면 꼭 새우깡 사줄꺼다. 나 돈 준거 엄마랑 외할아버지, 특히 외할머니한테는 절대 비밀로 해줘"

그런 날 군포 집으로 돌아가는 이모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외가댁 골방에서 없어진 이모는 30년 넘게 수원 어디 쯤의 장기 요양원에 계신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막내 외삼촌만 한 달에 한두 번씩 면회를 가셨는데 내가 몇 차례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윤허하지 않으셨다.

자존심이 유달리 세고 체면을 중시하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현숙이 이모는 평생 얄궂은 안개가 되었고 당신들께 두 번째 참으로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두 분 모두 돌아가시는 마지막 날까지 둘째 딸 걱정을 계속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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