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외할머니의 자서전 2.(남편과의 결혼)

by 하니오웰
20250323_052644.jpg


외할머니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결혼식 때 처음 보았지요. 인물이 별로 없어 보였어요. 첫 인상이 별로 안 좋았지요.

살다보니 차츰 나아보이더라구요. 사실 얼굴도 자세히 보지도 못했어요.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 하던 때에요. 부끄럽기도 했고요.

결혼은 친정 어머님께서 하라셔서 그냥 했어요. 정신대를 뽑던 때라 결혼 말이 나오자마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한 거지요. 공출만 나오면 나가야 할 때라 소문에 이웃 마을에 공출이 나와 누군가 한 사람 불려 갔다고 하더군요. 지목 당하면 안 간다는 말을 못하던 때였어요. 정신대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막 돌던 때라 안 한다고 할 때가 아니었지요.

결혼식 때 시댁에서 신부 옷을 해보냈는데 마음에 들었어요. 바느질을 아주 잘해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했지요. 종부인 사촌 큰형님이 만드셨대요. 친정 밤실에서는 돼지도 잡고 술도 빚어 잔치를 치렀지요. 며칠 후 점촌 인쇄소로 오니 국수, 부침, 돼지고기 등을 차려 잔치를 했어요. 겹잔치였지요. 시어머님 환갑날과 막내아들 결혼식을 같은 날에 치른 것이었어요.

신혼살림은 경상북도 상주 오대에서 했어요. 결혼 당시 애들 아버지는 직업이 없었어요. 시어머니께서 부치고 살라고 땅을 주셨지요. 그걸로 농사를 지으며 얼마간 살았어요. 이년 후 애들 아버지가 점촌 문경 중학교 교사로 가게 되었지요. 나는 부치는 땅과 집이 있으니 당장 갈 수가 없었지요. 농사도 짓고 애들도 키우며 오대에서 좀 더 살다 몇 년 후에 점촌으로 나왔어요. 농사가 작은 편이라 작은 머슴(10대 중반 소년)을 두고 했어요. 시어머니가 주신 밭 다섯 마지기, 논 여섯 마지기로 지었어요.


큰 아들은 오대에서 태어났어요. 큰 애가 너댓살 무렵되어서야 점촌으로 나왔지요 오대에 집을 새로 지었고 농사 지을 땅이 있어서 바로 못갔지요. 그 때 집안 어른이 땅 여섯마지기 판 걸 어떻게 알고 사업을 한다고 빌려 달라고 계속 졸라 어쩔 수 없이 애들 아버지가 그 돈을 드렸어요. 결국 사업하다 다 날려버리고 말았대요. 시어머님께 받은 땅 여섯 마지기이고 농사 지으며 정든 땅이 그렇게 사라졌어요. 오대 땅은 토질이 좋고 논도 여러 개로 나뉘어 있어 농사짓기가 아주 좋은 땅이었어요. 갈고 닦은 땅을 팔고 그 돈까지 없어져 무척 아까웠지요.


애들 아버지도 없이 나 혼자 농사 짓고 애 키우는게 힘들었어요. 애들 아버지는 점촌에 근무하러 가고 오대엔 큰 아들, 큰 딸 둘 데리고 살았어요.

젖이 무젖이라 자꾸 설사가 나니 빨래가 많아 손이 다 부르트고 아팠어요. 그 땐 무젖이 뭔지도 몰랐고 왜 애기가 자꾸 설사하는지도 몰랐어요. 날이 궂으면 빨래는 마르지 않았고, 빨 건 수북이 쌓여 밀리고, 정말 힘들었지요. 애들이 자주 열이 나고 아픈 것도 힘들었어요. 큰 애는 첫 애라 젖이 많아서인지 설사도 더 많이 했어요. 한 번 나면 팍 터져 퍼져나가 벽까지 다 버릴 정도로 양도 많고 심했지요. 애들이 다 설사를 했지만 첫 애와 다섯 째, 여섯 째가 설사도 자주 나고 열도 잘 났어요. 살림하며 애 키우며 애들 아픈 게 제일 힘들었어요.



외할아버지 인물이 좋았는데 외할머니 생각은 다르셨구나. 머리숱 때문인가?

정신대 얘기가 아찔하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6남매의 막내였는데 오직 외할아버지만 글과 그림을 좋아했고 나머지 형제들은 놀음으로 선친의 재산을 다 날려 먹었다고 하니 그 시절 집안마다 놀음이 안긴 폐해가 정말 심각했던 것 같다.

나는 팔삭둥이라 온갖 장기가 안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설사가 심해 엄마는 매일 기저귀를 삶고 빠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외할머니의 고됨의 수위가 훨씬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시절 부모님들은 정말 초인의 영역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제 들은 얘기로 마늘이 교회 초등부에서 겪은 일인데 연극 준비할 때 대본에 '아이들이 5분 정도 무릎 꿇고 대사 치는 장면'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이들은 1분도 못 버티고 일어나며 울고 불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기가 막혔다. 나도 이 다리로 숱하게 무릎을 꿇고 벌 받고 살았었는데 그 아이들은 '체벌의 영역도 아닌 공연의 일부 장면도 소화 못 하나?'

시절이 과거에서 미래로 갈수록 오붓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애와 다섯 째, 여섯 째의 설사 빈도를 기억하시는 홍 사비나 여사님의 기억력이 놀랍다.

기록은 힘이 있다.


덧 : 프로야구가 개막 했다.

내 딸은 프로야구 개막을 아주 싫어한다.

올해도 그 팀이 우승하기를 바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진상! (아이유~)과 미라클 모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