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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태어났는가?

by 하니오웰




인간은 저마다의 운명을 짊어지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났다.

나는 순천향 대학교에서 1977년 6월 3일에 태어났다.

엄마는 막내의 생시를 몰라서 나는 여태 궁금한 영역의 사주들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살아 왔다.

애정운이나 궁합은 그래 이제 되었다 치고 승진운도 부박한 욕망의 폭주 기관차에 다시 올라탈 생각이 현재는 없으니 집어 치우자. 그래도 나의 미래운을 옅봄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나의 과거는 좀처럼 바꿀 수 없고 현재에 집중하지 못 해 수 많은 '지금'을 '방금'으로 밀어 내며 놓쳐 흘려 버리는 짓을 계속할 터이니 서툰 미래나 한 번 점쳐 보고 귀호강이나 해 보고 싶은데 말이다.


인간은 생명 자체의 환희를 넘는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고 살고 싶어한다.

어떤 종류의 무엇을 먹고 마시는가에 관심이 있고, 어드메쯤에 사는지를 중시하고, 오직 그것을 살 수 있다면 더 이상의 향락을 좆는 포말은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마지막 다짐 따위를 더해가며 살아간다.

찰나와 말초적 쾌락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생산 맹신주의와 자본주의의 첨예화를 경계하는 시늉도 한다.

어제 넘긴 막걸리 몇 되빡과 홍탁이 어우러진 숙취에 얻어 걸린 새벽 해를 게슴츠레 보며 육체보다 정신이라는 섣부른 뇌까림을 길어올려도 본다.

'아스파라긴산'이 속을 위무해 주면 저녁에 바로 정신보다 육체에 다시 깃들기를 반복하는게 인간이다.

해가 들고 나면 그 날의 비의와 기이한 일상이 덧대어 주는 세상의 무렵들을 제정신으로 버티기는 민망하다는 대상 없는 타협안을 내놓고 '익숙한 다정함과 값싼 동정'을 다시 찾아나서는게 인간이다.


삶의 내면적인 원리로서의 도덕과 양심은 인간 문명을 지탱하자고 자리매김한 법과 과학, 기술 등에 쉽게 자리를 내어주기 일쑤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 생산과 수량의 가치만을 실현하는 기계가 아니다.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고 향유할 천부적이고 생래적인 권리가 있고 일신의 안위와 가족의 안녕을 도모해야 하는 책임 귀속적인 의무도 있다.

행복은 언제까지나 유예해도 좋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고 선험적으로 부여된 탈가치적인 눈부신 봄날의 전제 조건으로 푸르르게 한껏 흐드러져 보고 싶은 인간의 목표가 된다.

설핏하고 공허하게 온 주말의 낮잠에서 께어났을 때도, 어둑시니 신세로 기약 없이 암담한 병마의 굴레에서 헤매이다가 가까스로 벗어났을 때도, 삼 수의 지난한 세월을 거쳐 명문대 의예과 합격증을 거머쥔 때에도 우리는 행복을 꿈꾼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더 선명한 행복을 꿈꾼다. 그것이 욕망이든 희망이든, 기회든 가능성이든 명칭과 수단은 중요하지 않고 갓 태어난 신생아의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우리는 이 쪽에서 저 쪽으로의 도약을 꿈꾼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행복보다 불행이 더 이 세상을 오래,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틀' 속의 인간이다.

숙명인 것은 인간은 동물 중 가장 약한 생명체에 속하면서 가장 잇속이 잘 돌아가는 생명체인지라 여러 '규정과 규격'에 맞물려 있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남자이거나 여자이다. 각자 부여된 곳간의 깊이는 다르고 태어난 위도도 다르다.

그것들은 스스로의 의지나 선택의 영역과 무관한 '틀'이고 어느 정도의 우연이나 어느 정도의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결정적인 옹이 같은 단단함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 없이 '자기의 이유'과 '바깥을 꿈꾸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피안에 대한 열망이나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나 지향이 없이 어찌 인간이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꿈꾸는 자만이 공포나 절망에 난파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는가?

태어난 김에 살지 말고 살아가는 김에 행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꿈 꿀줄 아는 사람만이 '틀'을 깨고 새로운 가능성의 첫 자락에 서볼 수 있지 않겠는가?

태어난 김에 죽지 말고 죽어가는 김에 구체적인 희망을 품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폭삭 살았수다'라고 말하고 켜켜한 가벼움으로 떠날 수 있다면 좋지 아니한가?


집단적 추상과 산뜻한 정열에 몸을 내맡기기만 하면 되는 나의 '안락한 젊음'의 계절은 가고 파편적 구체성과 현실의 복잡함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무거운 황혼'의 계절이 서서히 열리고 있다.

다음의 직면도 고난이다. 다시 처음부터 구체적인 현실에 발을 딛고 시작해야 한다.

현실의 파편들을 다시 긁어모아 그것들을 서시히 '희망의 미래'로 통합해 가기 위한 지난한 세월을 또 다시 견뎌 올려야 한다.


결국 정답에 가까운 오답은 구체성으로의 회귀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실의에 빠진 인간들과 역사를 다시 건강하게 세워 올릴 수 있는 원천은 '구체와 사랑'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태어났으면 구체적인 사랑을 품고 자신을 갱신할 수 있는 세계로 자기를 넘겨 보려 시도하는 것이 출생의 이유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에서 시작하여 금욕의 아픔에 대한 이해를 통한 '갱신에의 정열'이 행복을 향한 위대한 인간의 여정이라고도 생각해 본다.


우리들 모두 죽음의 그 순간에.

'폭삭 속았수다(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말 한 마디 정도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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