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4.
'4.3 제주 항쟁 77주년 추념식'과 '트럼프의 상호 관세 발표일'의 다음 날.
'친형의 생일날'이자 딸이 3개월 마다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호르몬 주사를 맞는 날.
나랑 딸 둘이 양양 쏠비치로 놀러가기로 한 날이자 윤석열의 '탄핵 선고 발표일'이었다.
하나 하나가 아주 묵직한 여러가지가 복잡하게 섞여 든 날.
새벽 2시 58분에 깼다. 사실 2시 반부터 깼다. 다시 자려 했지만 잘 수 없었다.
일어나 '미라클 모닝' 방에 기상 신고를 했다.
다시 자야 했다.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날.
그래도 1일 2포는 지키고 싶었기에 일기의 초안을 잡아두고 다시 누웠다.
1시간 정도 더 잤다.
"아빠 병원 늦으면 책임 질꺼야?" 딸이 보챈다. 일기를 올리려 마무리 퇴고중인 나를 재촉한다.
세브란스 병원 도착.
오늘 주사가 지난 2년 중 제일 아팠단다.
"아니 아빠 이 쪽으로 돌아와서 앉으면 되잖아."
방사선 촬영실 5호실 앞에서 길을 막은 유모차를 건드려 옮긴 나를 딸이 혼낸다.
아침부터 무언가에 마음이 꼬여 있는 딸이 계속 톡톡거린다. 일부러 이유를 묻지 않고 있다. 참아야 한다. 앞으로 40시간을 붙어 있어야 하는데 초장부터 망칠 수 없다. 참았다.
오전 10시 39분. 시동을 걸었다.
뚜레쥬르에서 산 샌드위치를 먹으며 라디오를 켠다. 빨리 집으로 향해야 한다.
추월본색 발동! 미친듯이 요리조리 밟았다.
10시 59분. 1분 남았다. 서둘러 집으로 올라간다.
나는 서재방. 딸은 거실.
블로그에 실시간 넋두리를 쓰며 본다.
11시 22분. 환호성이 터진다. 나보다 딸이 더 소리가 컸다. 키운 보람이 있다.
여기저기서 카톡이 터진다. 카톡에 답할 시간이 없다.
11시 30분. 양양으로 출발.
딸은 멜론에서 사흘 전부터 준비한 앨범을 튼다. 이번엔 좀 봐줘서 총 62곡 중 내가 좋아하는 노래도 10곡 담아줬다. 앨범 제목은 '놀라갈때 차안에 틀음면 더 기대되는.'이다.
저 '음'자가 오타가 아니고 음악의 '음'이라면 쫌 인정. 물어보진 않았다.
해묵은 걱정거리가 가셔서 가는 길이 가볍다.
오후 1시 5분.
가평 휴게소에 도착해서 아가는 치즈떡볶이, 나는 핫도그 하나를 먹었다. 점저를 맛난 걸로 먹기로 하고 다시 밟는다.
조용히 음악에 집중하던 딸이 학교에서 자꾸 리더를 한다고 나서는 한 아이에 대해 말한다.
"아빠. 그 애는 다른 친구들의 말과 생각은 들으려 하지 않아. 자기 생각대로만 해. 그러면서 항상 자기가 리더를 하겠다고 설쳐. 그 애는 나처럼 외동인데 아마 그 부모님이 그렇게 자기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둬서 더 그런 것 같아. 결국 우리 모두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자기랑 생각이 다른 애의 뺨을 때린 적도 있어. 미친 거 같아. 걔도 탄핵 해야 해."
"담에 그 애가 혹시 너 뺨 때리면 너도 때려. 다른 친구 때리는거 보고 안 아픈 줄 알았다고 해."
"아빠. 공산주의랑 민주주의를 설명해줘."
갑작스런 질문.
"음. 공산주의는 빵 100개를 100명이 똑같이 하나씩 나눠 먹자는 생각이야. 근데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려면 정부의 힘이 세야 하겠지? 그래서 그 생각으로 일하는 정부, 예를 들어 북한은 대장이 나쁜 맘을 먹으면 쉽게 지금처럼 독재로 흘러 가버릴 수가 있어. 공산주의의 반대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자본주의야. 빵 100개와 100명의 상황은 같은데 능력이 있는 사람이 빵을 한 개 이상 더 가져갈 수 있게 허용한 생각으로 돌아가는 사회지.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나라가 자본주의라 생각하면 돼."
"민주주의는 나라의 힘이 국민들한테서 나온다는 생각이야. 국민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살게 하려고 정부, 법원, 국회를 두는 거지. 아까 몇 시간 전 탄핵은 누가 잘못해서 일어난거지?"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은 정부의 대장이었는데 자기한테 주어진 힘 이상을 쓰려 했어. 법원과 국회를 자기 맘대로 하려 했어. 그러면 민주주의 유지가 안 되겠지. 그럼 어떤 나라처럼 되겠어?"
"북한!"
예상치 않은 대화. 둘이 가는 차 안에서 예상치 않았던 대화가 이루어졌다.
안그래도 기억에 깊이 남을 여행인데 더 오래 깊이 박힐 수 있는 대화를 한 것 같다. 기분이 좋다.
가는 내내 이런 저런 얘기로 심심하지 않았다.
오후 2시 40분 도착.
생각보다 양양 쏠비치가 커서 체크인 건물을 찾기 힘들었다.
E동 205호. 방문을 열고 들어간 딸이 방구조가 맘에 들었는지 신나게 침대 위에서 방방 거린다.
'이즈나' 신곡 유튜브를 몇 개 보더니 배고프단다.
근처 맛집을 찾았다. 나는 회가 먹고 싶었지만 딸이 불허했다.
4시 5분에 '비송 한우 돈우 숯불구이'에 들어갔다.
등심 2인분을 시켰다. 소고기를 잘 못 굽는 나는 사장님께 부탁했고 여사장님은 콧물을 연신 훌쩍이면서도 웃으며 구워주셨다. 고기는 거의 딸이 먹게 하고 나는 냉면과 비지찌개를 공략했다.
1인분(42,000원)을 더 먹을건지 조마조마 물어보니 괜찮단다. 나를 닮아 눈치가 빠르다.
나오자마자 옆에 있는 CU편의점을 가잔다. 과자를 두 개 사고 혹시 밤늦게 먹을만한 야식으로 '전복버터볶음밥'과 '수제비'를 샀다.
숙소로 돌아와 냉장고에 나눠 넣고 잠깐 티비를 켰다. 유튜브에서 '폭삭 속았수다'를 검색해 관련 영상을 한 시간쯤 같이 보고 호텔 조식 식당에 전화를 걸었다.
딸래미는 어릴 때부터 호텔 조식을 좋아했다. 예약하려고 아까 3시부터 계속 전화해도 전화를 안 받더니 예약 마감이란다.
"그래서 내가 직접 가서 예약하자고 했잖아!" 딸 마음이 심하게 상해버렸다. 침대에 누워 눈물까지 보인다.
우리는 차로 내려왔다. 바닷가 근처 뷰맛집 카페를 가려 했는데 투덜거리며 감기약을 먹은 딸래미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두세군데 카페 중 맘에 드는 곳을 찾아가 딸을 깨웠다. 얼핏 보더니 그냥 잔단다. 한 시간을 더 잔다. 날이 추워 히터를 좀 틀어 줬다.
일어나더니 카페를 간단다. 바닷가가 아니어도 된단다. 양양군청으로 향했다. 왠지 가보고 싶었다. 8키로 정도 달렸다. 양양 군청 근처 상가들의 불이 모조리 꺼져 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더 돌다가 검색을 다시 했다. 결국 다시 숙소 근처로 왔다.
저녁 8시 5분.
우리는 'DODO 카페'로 들어갔다. 여자 사장님이 그냥 딱 봐도 유하고 따뜻하다. 기품이 있다.
딸한테 계속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셨다. 딸 기분이 말랑말랑 해졌다.
나는 '수제 청귤차', 딸은 '청사과에이드' 와 쿠키를 시켰다.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사장님이 직접 가져다 주셨고 맛도 기분도 일품이었다. 좀 있으니 시나몬 꿀케이크와 크로아상을 갖다 주신다.
"딸이 너무 예뻐서 그냥 드려요." 딸은 '고개가 깊을수록 어른들의 지갑이 열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평소의 가르침 대로 더 넙죽 인사를 잘 한다. 미소량은 아직 좀 부족하다.
사장님이 엄청 친절하셔서 다음에 마늘과 셋이 다시 오고 싶어진 곳이다. 블로그를 찾아보니 사장님의 친절함에 대한 칭찬이 덕지덕지했다. 덕분에 숙소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기분이 참 좋았다.
밤 9시 35분.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씻고 티비를 켰다. '박보검의 칸타빌레'에 스텔라 장이 나왔다.
목소리가 좋고 노래도 좋아서 우리는 앞으로 '스텔라 장 팬' 하기로 했다.
나는 잠깐 다른 짓을 하고 있었는데 하니가 뭘 한참 찾는다.
프랑스 말로 '아주 잘생긴 남자'를 '시벨옴'이라고 스텔라 장이 말한 부분이 재밌었나보다. 네이버에 들어갔다가 구글에 들어갔다 바쁘더니 결국 재생시킨다.
"씨벨놈. 씨벨놈."
우리는 10번 정도 틀었고 계속 까르르 웃어 제꼈다.
송소희가 나왔다. 성형량 때문에 더 보긴 힘들었다. 유튜브를 켰다. '엔믹스 예능'을 보고 우리는 잠을 청했다. 자기 침대가 좋다며 데굴거리더니 "아빠 내 옆으로 와"라고 말한다.
넘어 갔다. 좁다. 좁아서 좋았다.
다음날 나는 저녁까지 놀고 올라가려했는데 아점 먹고 빨리 올라가잔다. 친구들과 놀고 싶단다.
'낙산사'도 가보고 싶었는데 아쉬웠지만 '언명'이 떨어졌고 나는 이제 이른 귀경에 기분 좋은 아빠가 되어야 했다. 숙소 근처 맛집을 찾고 있었는데 올라가다가 휴게소에서 대충 먹자는 '명령'이 추가되었다.
네비게이션에서 '우리집'을 찍었다. 좀 달리다보니 약을 먹여야 하는 것이 떠올랐다.
오전 11시 20분.
'양양 대포면옥 분점'으로 들어갔다. 다른 막국수 집을 제안했던 내 의견이 묵살된 '수정안'이었다.
외부부터 깔끔했는데 들어가니 넓은데 정갈했고 맛집 스멜이 났다. 물막국수 2개에 만두를 시켰다. 하니는 촉이 좋다.
"아빠. 나 수육도 먹을래." 모든 메뉴의 맛이 훌륭했다. 찾아보니 정말 맛집이었다.
사장님이 둘이 이걸 다 먹을 수 있냐며 놀라셨다. 우리는 남기지 않았다.
서울로 출발. 달리다 보니 비가 내렸다. 세차게 내려 속도를 내지 못했다.
올라오는 길에도 계속 장난을 쳤다.
딸과의 여행. 다툰 순간도 좀 있었지만 완벽한 여행이었다. 추억 #3 안 쪽으로 들어갈 것 같다.
'전복 버터 볶음밥'과 '수제비'가 아직 양양 쏠비치 205호 냉장고 안에 있다.
차기 대선일이 내 생일날로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