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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6.(한국일보 입사)

by 하니오웰




아버지는 1966년도에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했지만 취직을 하지 못했다.

서울에 있는 주요 일간신문사들의 입사시험을 치렀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졸업 전에는 대학을 졸업하면 고향에 내려가 할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할아버지가 반대를 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양복쟁이는 평생 양복쟁이밖에 못 되는 거여. 나는 네가 넥타이 매고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양복점을 하던 시절 할아버지는,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들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쑤시개로 이빨을 쑤시며 식당에서 나오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때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만류하지 않으셨다면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사업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것이다.

'사업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셨을지는 의문이다.

아버지는 인간에 대한 정이 넘쳐 당신이 이런저런 여력이 안 될 때라도 뭐라도 누구에게든 계속 퍼주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세를 확장 시키지는 못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리 했다면', 할아버지가 둘째 아들 등에 의해 가업과 가세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자식 이기는 부모 없으니)을 속절없이 목도하다가 돌아가시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결정적으로 일단 나는 태어나지 못 하긴 했겠다.

그 쩌렁쩌렁하던 호남의 갑부가 무너져간 얘기를 아버지가 엄마한테 가끔 해줄 때는 항상 '남 얘기 하듯' 호탕하게 웃으며 전하셨다고 하니 아버지의 그릇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아버지가 신문사 입사 시험에서 실패하자 할아버지는 1967년에 연탄공장을 차려 주셨다.

'영천표'라는 연탄을 찍어내는 소규모 연탄공장인데 광주시 북동에 있었다. 아버지 지인 몇 분이 공동 출자하여 연 것이다. 나이가 어린 아버지는 부사장이란 명함을 지니고 그 공장에서 7~8개월 근무했다. 하지만 당시의 국가시책이던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에 밀려 연탄공장은 사양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공장운영이 어려워진 1968년 봄, 아버지는 군산에 있는 멜볼딘여고에서 강사로 한달 보름 동안 근무했다. 광주에 있는 조선대 부설 중등교원 양성소에서 교육을 받으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준다기에 강사 생활을 그만두었다.

조선대 부설 중등교원 양성소에서 6개월의 교육을 받고 2급 정교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문리대 사학과를 다니면서 교직 과정을 이수하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하셨다고 한다.

1969년 3월부터 8월말까지 6개월 동안 아버지는 광주 살레시오고에서 국사와 세계사를 가르쳤다. 그 당시 당신이 정말 좋은 교사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고 하셨다. 입시만을 위한 수업을 했는지 모른다고 술회하셨다. 역사 교사는 고교생들의 인생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당시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되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며 당시의 제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역사 선생님을 했다는 사실을 이 아침에 처음 알았다.

엄마도 아버지도 다 '교편의 이력'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놀라웠다. 두 분 다 반 년 정도 뿐이었지만 부모님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직업을 가졌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다.

나의 어릴 때 꿈 중에는 '교사'도 있었다. 다리 때문에 포기했고 지금도 그 종류의 직업은 '가장 위대한 직업군'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문리대 출신들은 상당수가 언론사로 진출했다. 아버지는 살레시오고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다시 기자 시험에 도전했고, 스물 아홉이 되던 이듬해 1970년 한국일보 기자 공채 26기로 입사했다.

아버지는 몇 년 뒤 그 회사 후배랑 결혼에 이르렀다.


1970년 12월 1일 첫 출근을 하는 아버지 심정은 착잡했다.

나이에 비해 입사가 늦은 편이었다. 너무 늦은 나이에 언론사에 입사한게 아닌가 생각을 했다. 후배들이 입사 선배가 되어 있었다. 선후배 위계 질서가 엄격한 기자 사회라 스물 셋에 입사한 대학후배를 스물 아홉의 아버지는 깎듯이 대할 수박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세 번째 대통령 출마를 위해 3선 개헌을 하고, 언론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언론은 완전히 통제된 채, '정권의 홍보지 역할'을 일관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일해보고 싶었던 신문사였지만 막상 통제된 언론의 실상을 앞에 두고 깊은 실망감을 느끼셨다고 한다.

그런 언론 현실에 염증을 느끼며 1년 여를 보내다가 아버지는 어느 날 선배 기자에게 부탁했다.


"형, 나 기자 그만하고 교편 잡았음 좋겠어..."

"왜 그래? 김 기자!"

"아무튼 부탁해, 선배..."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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