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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7.(전사가 되기 직전)

by 하니오웰


한 달쯤 지났을까, 그 선배가 애써 마련해온 것은 서울의 시내 고교의 지리교사 자리였다. 내 전공은 역사 과목인데 말이다.

"ㅇㅇ이, 그 때 지리라고 했었지?"

"형, 나는 역사잖어?"

어이가 없었다.그나마 교직으로 일터를 옮기고 싶은 마음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 당시 아버지는 신문기자보다 교사가 맞는 성격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신문사 편집부에 근무하면서 데스크로부터 핀잔 듣느라 정신이 없던 일상이었다고 한다.

입사 후 처음 한달 보름 동안 견습기자로 노량진경찰서를 출입하게 되었다. 당시 노량진서 출입기자는 안봉환 선배였는데, 그날도 안 선배를 따라가 형사과 난로 곁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그 때 어느 정도 낯을 익힌 형사계장이 말했다.

"김기자, 실례지만 기자 하기 전에 무얼 했오?"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요!"

"내가 잘 봤구먼! 내 보기에도 그 편이 기자 생활보단 김기자에게 잘 맞겠소"

그런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아버지는 쑥맥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아버지가 그리 생각하셨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우선 아버지는 남한테 아쉬운 소리나 부탁을 하지 못한다. 남이 아쉬운 소리나 부탁을 하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냥 다 들어준다. 거절을 못 한다.

그것은 경제적인 유복함이 차고 넘치던 집안에서, 장남으로 살았던 가정적, 역사적 배경도 있었겠지만 타고난 성품이 그러했다. 품이 넓었고 사람을 좋아했다. 그저 정이 많았다. 아버지는 '휴머니스트'였다.

기자라는 직업은 '취재'가 숙명이고 잘은 모르지만 취재를 하려면 아쉬운 소리를 해야할 경우, 양해를 더해야 하는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휴머니스트고 나발이고 아버지는 '할아버지'라는 예봉만 피하면 자기 맘대로 다 되는 무소불위의 세상 속에서 오래오래 살아오지 않았던가?

또한 아버지는 자잘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분이었다. 체계적인 성격이 아니며 그리 창조적인 위인도 못 된다. 앞자리 친구의 '설렁탕 그릇 속 고깃 덩어리'에 결코 부러운 마음을 싣지 않는다. 그냥 한 그릇을 더 시키는 분이었다.

작은 과제나 현상을 잘게 나눠 벼리고 다져 치밀하게 분석, 평가하여 감정을 덜어낸 객관적 결과값이나 분별 있는 원고를 시의에 맞춰 탁탁 뱉어낼 수 있는 정밀한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을 오랜 시간 끈기 있게 연구하고, 새로운 이론이나 사실을 발견하거나 창출하여 시대를 놀라게 하고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능력은 더더욱 없는 분이었다.

다만 작은 마음들을 크게 만들어 모아내거나 억압과 불의에 두 눈 부릅뜨고 분연히 일어나는 일, 가슴을 머리보다 뜨겁게 세워 시대의 교조화된 권력의 담론들을 정면으로 관통하여 싸우는 따위에 걸맞는 분이었다.

간절한 '마음'과 뜨거운 '정의'를 모아 뚝배기 깨지더라도 정통으로 큰 바위에 달려가 부딪히는 분이었다. 작은 겁은 많았지만 큰 겁은 없었던 분이었다.


아버지는 '교사'에도 맞지 않는다. 교사는 공무원이다.

공무원이란 조직은 '정형화된 틀과 위계 속에서, 우물 안에서' 찌부러진 귄위에 기대어 비겁함과 온갖 알량함이 섞이는 곳이다. 그 당시에도 짜치는 비리와 맥락 없는 타협의 시도는 찰랑찰랑 했을 것이고 말이다.

'자유와 새로움'을 ,'인간에 대한 구체적이고 넓디 넓은 사랑'을, 더러운 안주보다는 반푼어치의 진보라도 그것이 옳다고 여겨지면 그대로 추구하는 내 아버지가 그 닭장 속 삶에 어찌 젖어들고 즐겨할 수 있었겠는가?

그냥 저 상술한 아버지의 생각은 희뿌연 안개 속 인생의 시보철에 드잡힌 새로운 직업에 대한 습관적 거부감, 새 물의 청신함에 대한 구태에 젖은 헌 사람의 속아지였으리라.


아버지는 신문사에 입사해 경찰 견습기자를 하는 동안 회의가 많이 들었다고 한다. 누가 연탄가스로 사망하면, 사망자의 증명사진 한 장을 입수하기 위해 산동네를 헤매고 다니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에 빠진 나머지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외신부에 근무하는 문리대 선배를 찾아가 경찰서 견습기자 그만하고 다른 부서로 옮길 수 없는가 상의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한국일보에 함께 근무하는 동료 기자들과 빠른 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는 까닭에 친구들이 쉽게 늘어갔다.

그걸 두고 어떤 후배 기자는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형님처럼 사람을 잘 사귀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결혼 후 엄마는 없는 살림에, 두 아들은 끝없이 칭얼거리는데, 언제 들어닥칠지 모르는 취객들의 행렬이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한다. 손은 느리고 엄마도 퇴근 후의 상태였는데, 손님은 끝이 없었고 돈은 없어 외상도 끝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 기자 부부라고 동네 슈퍼에서 계속 퍼줬던 것 같다. 끝끝내 그 외상들은 다 갚았을 엄마라는 위인이긴 해서 그 부분은 굳이 확인한 적이 없다.

몸은 고되었지만 사람들이 참 맑았고, 인품과 성품이 바르고 곧은 사람들이 많아서 엄마는 그 시절을 말간 그리움으로 자주 회상하시곤 했다.


그랬다. 아버지는 스치면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친구가 될 수 있는 분이었다.


한국일보사의 편집부에 근무하면서 사내 교제 폭이 넓어져 8시쯤 퇴근하면 으레 선후배 동료 기자들과 어울려 술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비록 견습 기자였지만 나이가 있다 보니 세상사에 있어서는 선배일 수 밖에 없었고 당시는 시대 상황이 상황인 탓에 정치적인 화제로 매일 밤을 지새우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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