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미라클 모닝 글을 쓰려고 책을 골랐다.
요즘 회사에서의 고민 때문에 속이 시끄러워 '내가 애정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글을 쉽게 쓰는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책장에서 뽑았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마다 자주 꺼내 보는 책이다.
미라클 모닝 글을 다 쓰고 책장을 덮으려는데 이 책 제일 앞장에 있는 2018년 9월 23일의 내 자필 메모를 발견했다.
악필임에도 그대로 올려본다. 악필은 온 마음과 몸으로 진심을 다해 쓰는 것이기에 글씨가 저러한 것이라는 나의 오래된 생각을 밝힌다. 또한 이 지경이어서 부끄러워 '필사'를 시도하지 않고 있음도 밝힌다.
글씨가 어지러워 다시 옮겨 본다.
언젠가 배웠던 '육하원칙'이라는 것.
살면서 굽이굽이, 삶의 굴곡을, 그 씨줄과 날줄을 넘나들며 그 원칙들을 자문해 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 취중이든 몽중이든 자각과 반성, 교만과 도취의 시절이 있었다.
...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나는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가? 정신의 직립이라도 담보하려는 노력의 도상에 서 있는 것인가?
추석을 맞아 평촌 외할머니 댁을 찾았다.
민족 대이동의 첫자락이라 길이 많이 막히리라는 마누라의 말씀을 좆아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이제 막 39개월을 넘긴 딸래미와 아흔 셋의 외할매. 이런 연유로 1년 넘게 만에 오랜만에 찾은 평촌길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나는 엄마랑 오랜만에 대중교통(버스)에 나란히 앉았고 두런대던 와중.
"내가 너 미행했던 거 아니? 중학교 2학년 때였지."
서너명의 학우들이 내 걸음을 따라 걸으며 병신이라 빈정대는데 나는 두 눈 부릅뜨고 외쳤단다.
"그래서 어쩔건데? 어쩌라고? 재밌으면 계속 따라 걸어!"
엄마는 생각했단다.
"이 새끼 됐다."
.
.
.
그것이 나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2018.9.23.
퇴고가 없던 초고, 싱싱하고 내밀한 나만의 낙서이니 더 반갑다.
역시 나는 엄마와 아빠의 아들임을 다시 알겠다. 그냥 딱 정면승부의 인간이다.
그러니 나를 툭툭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무실 잡들아......
우리 엄마의 기개를 상징하는 여러 일화가 있는데 그 중 두개만 말해 보련다.
1987년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다.
우리 아랫집에 필리핀 남자와 한국 여자가 부부로 살았다.
그 남자는 프레스토 차를 형광색으로 요란하게 꾸미고 귀걸이를 하고 다니는 날탱이였다. 우리 가족과 마주쳐도 인사하는 법이 없었다.
우리집은 3층이었다.
계단에서 엄마랑 그 남자가 마주쳤다. 엄마는 38살, 그는 20대 후반의 건장 간장남이었다.
"오머니! 죠기 당신 아들 계단 내려올 때 너무 시끄로워요. 잘 좀 걸으라고 가르쳐봐요!"
"지금 뭐라 하셨죠? 다시 말해보세요."
"아놔. 이 아줌마. 제대로 좀 걷게 과르치라구여!"
"야 이 씨발놈아? 그 따위로 지껄일거면 꺼져 썅놈 새끼야. 지금 누구한테 그 따위로 말하는거야! 내 아들 보고 그게 할 말이 맞는지, 나한테 할 말이 맞는지 니 마누라한테 쳐물어봐!"
2층에서 마누라가 세차게 그를 데리고 내려갔다.
그 이후 그 양반은 내 엄마한테 아주 공손하게 인사했다.
2008년 18대 총선 유세 기간이었다.
우리 동네는 '은평 을' 지역구로 당시 한나라당 중진이자 이명박 대통령의 남자 '이재오 의원'이 4선에 도전하는 곳이었다. 그 총선에서 여당인 한나라당은 초압승(153석)을 했는데 이재오는 낙선했다. 그를 무릎 꿇린 것은 '문국현'이었다. 창조한국당의 그 1석이었다.
유한킴벌리 사장 출신의 문국현은 깨끗한 이미지로 2007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으나 서울 강남에서 부동산 거래로 약 20억의 시세차익을 얻은 사실과 2004년에 본인의 전원주택을 신축하면서 농지를 영농 목적으로 구입한 후 불과 한 달 만에 용도 변경을 신청한 것까지 알려져 도덕성에 똥칠을 했다.
두 딸이 모두 비정규직이어서 약자의 아픔을 안다는 식의 발언을 했으나, 선관위에 신고한 재산 내역에서 증여세를 납부하지 않은 상태로 두 딸에게 6억원 가량 현금과 주식으로 나눠준 사실이 알려졌다.
문국현은 '펀드매니저의 조언에 따라 재산 관리를 한 것일 뿐'이라며 변명했다. 그리고 이것을 대선 출마 직후에야 본인의 명의로 황급히 환원시킨 사실이 밝혀져 본인의 이미지를 또 갉아 먹었다.
그래도 젊은 층 사이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인기가 고공이었다. 그런 문국현을 나와 엄마는 싫어했다.
함께 도서관을 갔다가 우리는 올라왔다. 연신내역 4번 출구 앞(가장 번화한 곳)에서 문국현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계단을 다 올라온 엄마는 연단 근처로 직진했다. 불길했지만 뒀다.
"야 이 기회주의 새끼야! 다 집어치워. 위선자 새끼 같으니라구!"
판이 깨졌다. 웅성웅성. 문국현이 몇 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시죠?"
"야. 너 그 지랄을 떨어 놓고 또 출마를 하니? 내 아들이 세무 공무원이야. 너는 세금이나 제대로 내야지. 범법자 새끼!"
엄마는 5분 넘게 떠 쏟아냈고, 때로는 눈을 감고 듣고 있던 문국현이 말했다.
"어머니, 고정하세요. 제가 잘못이 많이 있죠. 그런데 반성하고 있어요. 다시 잘해보려고 출마한 겁니다."
"어? 너 귀여운 면이 있네? 내가 이 정도 했는데도 흥분 안 하고 가식일지라도 인정하는 척 하네? 오케이. 맘에는 안 들지만 이재오가 더 싫으니 당선 되던지 해라. 4년 정도는 할 자격은 있다고 쳐준다. 다만 한 번만 해먹고 그만 나와라.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집에 가서 열받아도 딸 때리지 말고"
철판 두꺼운 나였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벌렁벌렁, 엄마는 사뿐가뿐이다.
108번뇌로 고생하던 문국현은 2년여 뒤 의원직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