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과 딸을 아침에 교회에 데려다주는 길에.
현수막을 본 딸이 말한다.
"아빠? 왜 서대문구청에서 장기 축구대회를 해?"
아! 이 귀요미 우짜지?
내 딸 어릴 때 말버릇이 또 하나 생각나다.
'헤깔려'를 항상 '세깔려'라고 말했다. 귀여워서 일부러 그 단어를 쓰도록 많이도 유도했었다.
2학년 때까지 그렇게 말했었는데 요즘은 제대로 발음해서 아쉽다.
딸아. 제발 부탁인데 조금만 더 천천히 크렴. 아쉽다. 이제는 빨리 크는게 정말 아쉽다.
오랜만에 외할머니 자서전. 외할머니 구술을 그대로 옮겨본다.
아버님은 구장 일을 하시고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셨어요. 또 면위원을 하시며 동네 대표 역할을 하셨지요. 근방 몇 동네에서 아버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동네 유지셨지요. 바깥 일로 늘 바쁘셨고 동네의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하셨어요. 집안 일이나 농사 일을 직접하시거나 관여하시지는 않으셨어요. 대부분의 농사 일과 머슴 관리는 어머님께서 다 하셨어요. 어머님은 틈틈이 베나 면을 짜 팔아 돈도 모으셨어요. 길쌈을 아주 잘하셨지요. 손이 빠르고 솜씨가 좋아 사흘이 안되서 한 필을 다 짜셨대요. 내다 팔아 땅사는데 큰 몫이 되었다고 하셨어요. 머슴도 부리고 밥까지 해주셨으니 잠시도 쉴 틈이 없으셨을 것이에요. 두 분이 다 알뜰하고 검소하신 분이셨지요. 아버님은 머리가 좋아 어머님이 모은 돈을 잘 관리 하셨대요.
재산이 불고 땅부자가 되셨으니 자수성가하신 거지요. 어머님의 역할도 컸지만 아버님도 큰 몫을 하셨다고 생각해요.
내가 막내라 언니, 오빠가 태어나는 건 볼 수 없었고 큰조카가 태어나던 날은 생생히 기억나요. 조카는 나랑 여섯 살차이니까 내가 일곱 살 정도 되었을 때에요.
첫 애라 그런지 난산이었어요. 작은 집 종숙모와 언니, 친척 아지매 모두 다 대청 마루 밑에 서서 기다렸지요. 애기 우는 소리가 들리고 "아들이다!"라고 안에서 소리치자 모두들 기뻐했어요. 애기 우는 소리가 우렁차고 컸지요. 집안의 큰경사였어요. 아기 얼굴이 지금도 생각나는데 아주 이뻤어요. 조카를 업어 키운 건 마산으로 시집 간 그러니까 바로 위의 언니에요.
어머님께서는 점을 좋아해 누가 아프면 무당을 불러 굿을 했어요.
치료하기 보다 점치고 점쟁이가 하라는대로 했어요. 아버님은 점쟁이를 싫어하셨어요. 나도 무척 싫었지요. 가을이면 곡식을 한 짐씩 져 보내고 옷들도 태운다고 가져갔어요. 그럴 때마다 몹시 싫었던 게 기억이 나요. 아버님도 싫어하셔서 이런 일로 가끔 언쟁을 하셨어요. 그 외엔 집에서 큰 소리가 난 적이 없어요.
구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 하겠다.
나의 '외조모부'는 부지런하고 외향적이며 사람에 대한 정이 많았다고 한다.
'외조모모'는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고 강단이 있는 분이었다고 했다.
글로 만날수록 외할머니의 어머니가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할머니는 본인의 공부길을 막은 분이라 '당신의 엄마에게' 평생 서운함을 안고 살아가셨다. 전체적인 그릇의 크기는 '외할머니의 엄마'가 더 큰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들이 노름으로 집안을 거의 다 말아먹어 버린 어느 날 외할머니가 집에 와보니 '외조모모'가 자기 오빠들의 삼베옷을 결대로 짝짝 수백 개로 찢어 널어 놓으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노여움의 결기도 아무 소용이 없었고 아들들은 하나 남은 마지막 은수저마저 팔아 버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나의 장모님도 당신의 돌아가신 엄마가 '공부길을 막고 평생 일만 시켰다'고 술 한 잔 들어가면 원망을 하신다. 두 분다 제도권 교육을 받았다면 일정 이상의 높은 성취를 이루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귀한 기록에서 그 시절의 부질 없는 '남아선호사상'을 엿볼 수 있고, 과학적인 치료보다 무당을 불렀다는 대목에서는 그 시절 '범용한 아낙의 궂은 몽매'를 느낄 수 밖에 없다.
날씨가 궂다. 올해 벚꽃은 너무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