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신문사 임금 수준이 형편 없었기 때문에 모이기만 하면 월급 인상 투쟁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일보의 급여는 서울의 일간지 중에서 가장 낮았다. 하지만 투쟁은 말만 있었지 이루어지는 일이 없었다. 임금 인상 투쟁을 주도하는 개인이나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입사 동기들과 함께 일을 벌이기로 했다. 사표를 던질 각오로 한달 여에 걸쳐 준비한 다음, 1973년 5월 10일에 마침내 그 서슬퍼런 유신 치하에서, 그것도 언론사에서 월급 인상 투쟁을 하게 되었다.
조간지는 출근이 오전 10시였는데, 출근과 동시에 7개 자매지 기자들을 12층 강당으로 모이게 한 다음 오후 6시까지 태업을 했다.
그와 더불어 각 기별 대표 13명이 수권위원회를 만들어 사장을 면담해 담판을 했다.
당시 신문사로서는 급여 수준이 단연 높았던 동아일보 수준으로 급여를 끌어올리고 임금 투쟁을 마무리했다. 8시간 동안의 태업으로 요구는 수용되었고, 희생자는 한 명도 없이 만방으로 이겼다.
언론사는 군대식으로 위계 질서가 심해 입사 2년 반밖에 되지 못한 아버지는 사람 취급을 못 받을 때였다.
당시 편집국장은 5공 때 문공 장관을 역임한 이원홍 씨였는데 편집국장은 화장실 가는 길에 인사를 해도 받아 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7개 자매지 기자들이 강당에 함께 모여 8시간 동안 태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부대'의 긴장이 유지되어야 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저절로 주동이 되었다.
아버지는 대학 시절에도 학생 운동의 선봉이 아니었고 오히려 성실한 만학도를 지향하는 날라리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버지의 입담과 갈등과 부조리 상황에서 나오는 특유의 의기와 기개를 볼 때 '주동 세력의 스피커'이자 '기자들의 기자'가 되었을 것으로 충분히 사료된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해서 편집국 입구에서 아버지의 자리에 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편집국의 모든 선후배 기자들이 아버지에게 몰려들어 악수 세례를 퍼붓고 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쓸어대는 바람에 자리로 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태어나 살아온 나날 중 그 때를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으로 생각하셨다.
전사의 피가 깨워졌고 이후 온갖 환해풍파의 한가운데를 뚫고 투사의 길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입각점이 되는 사건이 된 것이 분명하다. 훗날 나의 엄마가 아버지를 선택하게 된 지점도 바로 아버지가 이 사건의 수괴였다는 점이었다고 했다.
비겁하게 기득권과 타협하지 않고, 가슴 속의 돌멩이를 꺼내 던질 줄 아는, 측량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착잡함을 계산하지 않는, 같은 인간의 다른 탄생의 순간이었다.
당시 편집국은 3층에 있었고 장강재 사장실은 5층이었으며 장기영 사주 방은 10층이었다.
10층에서 아버지를 부른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주는 종합 편집부장의 표정이 긴장이 어리면서도 미묘한 모습이었다. 당시 편집국 간부들은 이원홍 편집국장을 어려워했고 사장에 대해서는 두려워했으며, 사주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사주실로 들어섰다. 그 방에는 사주 혼자 있었다. 앉으라고 했다.
"김ㅇㅇ 씬가? 이번에 보니까 아주 정치적인 소양이 많던데..... 당신 내가 편집국장하고 정치부장에게 얘기해 놨으니까 정치부로 가게."
아버지는 긴장했고 여기에서 답변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본능적인 판단이 들었다고 한다. 이번 투쟁에는 5인조의 결사대가 있었다.
'만약 여기서 이 떡을 내가 받아 먹으면 나와 5인조 사이에는 금이 간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지나갔다고 한다. 당시는 유신 선포 7개월 후여서 신문 1면에는 제대로 된 정치 기사가 실릴 수 없었고 '정치 부재'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문자 그대로 정치는 없었다. 정치가 부재인데 정치부에 가면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고 한다.
"외신부로 가겠습니다."
"영어는 잘 하는가?"
"가서 배우겠습니다."
면담은 이렇게 끝났다.
아버지의 이 대화. 깊은 울림을 줬다. 이 순간의 대한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단락이 끝나 아쉽지만.
'정치부라는 떡을 받아 먹으면 기득권의 중심, 주류의 그것에 틈입한다는 것' , '5인조 동지들, 더 나아가 모든 투쟁의 동지들에게 배신의 전형이 된다는 것', '역사적인 투쟁으로 인한 달성이 빛나는 추억이 아닌 빛바랜 기억의 단편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것', '사주의 제안을 전면적으로 거절하지는 않고 면을 세워줄 것' 등 을 한번에 떠올려 발언하신 것이라 여겨진다.
어머니를 더 존경하지만 내 어찌 이런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