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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장기 3(-계엄 그리고 감옥-)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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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남편 이디 있어? 말 안 하면 대가리 박살 낸다."

중앙정보부 요원 두 명이 신발을 신은 채 집으로 쳐들어왔고 이후 4일 간 집에서 함께 머물렀다고 한다.

장애아도 낳아 보고, 중정에 쫓겨 다니느라 집에 들어오지 못 하는 해직 기자 남편을 둔 엄마는 자기 안에 있는 부끄러움, 공포를 버려내는데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지만 회고 하시기에 그 날. 그 새벽은 지워지지가 않는다고 하셨다.


그들은 신새벽 대문 앞 서슬 퍼랬던 결기와 달리 국제 여론에 신경 썼던 전두환 시절 따까리들답게 엠네스티 등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한국 기자협회장의 부인에게 일관된 예우를 다 했다고 한다.

두 명이 집 안에 상주해 있었고 서너 명은 집 주변을 계속 경계, 순찰 했는데 끼니 때마다 "총각이지? 맛은 없겠지만 국수라도 삶아줄까?" 라는 엄마의 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교대로 나가 밥을 먹고 왔다고 한다.

행색이 참 초라했고 멍하니 산 쪽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아 엄마는 속으로 '니들도 참 짠하다. 배 곯고 힘 없는 공무원이 뭔 수가 있겠냐?'라는 생각을 하셨다던데 나(지방직 나부랭이 공무원)는 그들이 공무원 중에 가장 힘이 막강하였고 부의 축적도 남달리 해냈음을 나중에 알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집안에는 5살, 4살 남자 애가 살고 있었는데.

5살 아이는 "아빠 어디 있어?"라는 아저씨들의 질문에 고개만 저어댔고, 엉금엄금 거리며 입만 잘 나불대던 4살 벌거숭이 동생은 "아저씨. 사브레 하나 사주믄 말해줄께요"라고 맹랑을 떨었고 '먹고 배짱' 짓을 반복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기가 찬 나다운 놈이다.

철수 할 때 요원은 용돈을 주고 갔는데 4살 놈은 신발장까지 기어 나가서 배웅을 하며 아쉬워 했다고 한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안정적 집권을 위해 광폭한 계엄 정국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아버지는 기자협회에 정부기관 기관원 출입을 금지하고 계엄사의 언론 검열에 제작 거부로 맞서다가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묶여 들어가 1980년 8월 결국 체포 되었다.

남영동 분실로 끌려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물고문, 전기고문과 인두로 배를 지지는 고문(15센티 정도의 자국이 있음) 등 숱한 고문을 당하셨고 나중에 루게릭병 발병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두고두고 80년 광주 5.18 민주항쟁을 제대로 보도해내지 못 한 것을 통한스러워 하셨다.

김대중 선생님은 사형, 아버지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1년이 넘는 옥바리지에 엄마는 여러 친척들에게 두 형제를 맡기고 광주 구치소로 향하는 날이 많으셨다는데 광주에서 올라온 친할미가 "니 어미가 밥은 해주냐?"며 물에 밥을 말아주셨던 기억이 난다.(엄마는 물에 말아준 적은 없다. 6살 때 아빠가 소주에 말아준 적은 있고...)


볼썽 사나운 기품의 할미였어서 추억이랄게 없고 남들에게 제법 있다는 할미의 품은 더더욱 없었다. 어릴 때부터 할미가 참 싫었는데 세월은 가끔 자기 몫 이상의 기여를 우리에게 해주는 것 같다. 지금 할미 생각을 하면 고소라도 좀 나오는 걸 보면...


세상과 우리네 살림살이가 많이 바뀌었지만 기자라는 직분은 '고난 속에서도 정의의 근처를 응시하려 노력하고 더디더라도 그 진실의 알갱이들을 길어올려 세상에 흩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금의 많은 기레기 펜쟁이들은 어떠한가? 를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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