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좌우의 균형을 못 잡는 절름발이의 그것으로, 지팡이 없는 장님의 그것으로 허공을 더듬거리며 허우적대는 것이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흔들려 보는 것이다.
어디든 좋고 무엇이든 좋다. 부러진 손잡이에라도 닿는 순간 손톱 저리게 움켜 잡는 것이다.
나는 넉 달 전부터 인생 처음으로 공개 '일기'를 쓰는 짓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조금 지나니 하트수와 답글을 보게 된다.
나의 글의 방향은 '동서남북'이다. 전문적으로 특별히 잘 하거나 해박한 영역이 없고 손끝 재주만 좀 있는 탓에 툭툭 이것 저것을 다 건드린다. 뒷간으로 마실 나가는 글이다.
그런데 네 달쯤 지나니 좀 알겠다. 어떤 종류가 잘 읽히는지.
예를 들어서 어제 올린 '정치' 관련 글은 잘 안 읽힌다. 반응이 적다. 역시 답글도 하트도 적다.
처음에는 그런 것에 신경을 썼다.
이거 내가 몇 시간 빨고 말린건데? 회피하네? 읽어 보면 그런 내용이 아닐텐데.
지난하게 유용한 무용함의 시간을 더했지만 발행 안 한 글들도 있다. 너무 유치하게 느낄까봐, 너무 적게 읽히면 효능감 스트레스가 올까봐. 썼다 지운 글이 많았다. 특히 초반에.
갈수록 나아진다. 점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모든 과정이 신나는 '창조'이고, 어떤 끄적임도 '능동'의 지점이며 큰 틀에서 나의 글쓰기는 완성으로, 결과로 가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모든 끄적임이 어쭙잖더라도 나의 고도의 집중의 산물이고 잉태의 소중한 과정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말을 자주 떠올리며 점점 발행한다. 그냥 등록한다.
'글쓰기는 Ok! 일단 ok다.'
글쓰기는 나만이 지을 수 있는 나만의 집이다. 그러니 거침 없이 쓰고 거침 없이 발행하자.
나는 안다. 내가 '시'를 쓰지는 못 함을.
나는 안다. 내가 '번개'를 품지는 못 함을.
나는 안다. 내가 '천둥'을 내리지는 못 함을.
나는 안다. 내가 계절의 '시의'는 느껴도 '비의'를 깨닫지는 못 함을.
그래서 나는 '산문주의자'다. 리얼리스트다. 유물론자다.
우선 독서량이 얄팍하다. 그래서 어휘량이 적다. 상상력이 빈곤하다. 감수성이 부족하다.
일상의 마이크로한 순간들을 깊이 관찰하여 올라오는 세밀한 감정들을 자유로운 창의의 감성으로, 가끔은 신의 언어로 풀어낼 자신이 없다.
나무와 나무, 가지와 가지, 뿌리와 뿌리 사이의 '근처'를 신비롭게, 가끔은 영원히 머무를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산문'을 쓴다.
재빠른 나날의 핵심이나 계절의 '허위'를, 인간과 사람 사이의 '비린내'를, 사물과 사람 사이의 '질투'를 잘 읽어 내는 능력은 좀 있다.
쉽게 던져진 단어들이나 가볍게 쓴 문장들의 배열을 바꿔가며, 벼리고 다지는 따위의 능력은 있다. '영끌' 재주는 없어도 '손끝', '마음끝' 재주가 좀 있다.
그래서 '쉽게 쓰여진 시'를 쓴다. 나의 글쓰기는 아직 산문에, 그리고 오래 '산문'에 머무를 요량이다.
나의 글의 방향은 주로 인간의 '허위와 불의'를 인식하거나 알아채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태어날 때부터 몸은 직립하지 못 했지만 '마음과 정신의 직립'은 지향했다.
나는 좀 원래부터 아쉬울 것이 없었다.
장애는 세상의 불의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 주었고, 싸구려 대낮의 회한에도 나를 익숙하게 만들었다.
분별이 더해지자 나는 '입장'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마침 지독한 엄마를 만났고 매일이 '지옥'이었다. 매일 새벽 나를 깨웠고 울고 불며 다리를 푸는 운동을 했다. 생에 대한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 생의 '비릿함'과 '모호함'이 점점 더 싫어졌다.
대학교에 들어가니 학생 운동의 마지막 끝물 무렵이었다.
나의 애미, 애비는 '반골'이었다.
각자의 집안에서 각자의 '장남'과 '장녀'였는데 기가 막히게 그 집안에서 그 둘만 뼛 속까지 '반골'이었다.
모범수로 학창 시절을 보내 제도권 교육에서 뽑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성과를 달성한 친형은 나와 같은 96학번이었고 그 시절을 강타한 '의약 분업의 선봉'에 섰다. 나는 그 형의 변신에 적잖이 놀랐다.
내 몫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반골값을 치러야 할 것 같았다.
형은 분명 20년간 '곱단이'로 살았는데, 나는 기질적으로 형보다 훨씬 심한 '반골'이었다.
술을 계속 먹으면서도, 픽픽 쓰러지면서도 부끄러웠다. 병신 값을 하고 싶었다. 세상 값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단과대 학생회장을 하고 있는 친구한테 가서 나도 다음부터 가투(가두 투쟁)을 나간다고 했다. 이 다리로 뛰었다. 최루탄을 맞았다. 눈물이 났지만 그것은 '따가움'이 아닌 '뜨거움'이었다.
몇 번을 나가다가 그만 두었다. 거리에 나가면 동료들이 나를 계속 신경 쓰고 챙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씨발스러웠지만 분루를 삼키고 그만 나가겠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안했다. 아무도 나에게 그 단어를 요구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동아리 학생회장 출마를 제안 받은 상태였다. 나가면 당선 각이었는데 엄마가 극렬히 반대했다.
고민하느라 몇 날을 못 잤다. 술도 줄였다. 나는 가투는 못 나가도 어느 핏발 솟은 리어카꾼의 목소리들을 듣는 '정의의 편'에 서고 싶었다.
결국 출마하지 않았다. 지금도 바로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보면 참 회한먹먹의 지점이다.
내가 그 때 동아리 회장을 했으면 나는 바로 정치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었을테다. 심지어 나는 '패스트트랙'이 있었으니까 그 때 만약 내가 가출해서 그 길을 갔다면 지금 나는 무엇쯤을 하고 있을까?
서설이 길었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진실'이나 '정의'에 대한 편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독서량은 적어도 현상의 이면을 관통하는 '직관'이 좋았고, 무엇보다 쉽게 가슴을 데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냥 나는 외모나 성격이나 기질이나 그냥 '나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나는 역사적 진실, 정치적 진실, 사회적 진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인간적 진실'을 옹호하고 지키는 힘에 관심이 있었다.
정치인은 못 되었고 가장 낮은 수준의 에너지 레벨의 인간이 득실거리는 '공무원' 따위를 하고 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지금 꾸준히 글이라는 것을 쓰고 있다.
살아가다 보면, 죽어가다 보면 우리는 지켜본다, 거슬린다, 시비 턴다.
대립과 모순이, 충돌과 싸움이 생긴다. 그 과정에서 야기되는 것이 '인간의 비인간성', '비인간의 인간화'이다. 불의와 편법이 춤을 춘다. 이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하고 맞서고 싶은 것이, 맞서야 하는 것이 '인간'이고, '나'다.
정치가 경제가 사회가 못 하는 것을 '문학'이, '글'이 하는 것인데 그 글을 쓰는 나와 우리는 아마츄어든 프로든 옳고 바르고 더 참된 것을 분별하고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뭐든지 써도' 좋지만, '뭐만 쓰면' 안 되는 것이다.
진실과 정의에도 기웃거리고, 동토와 비토 위에도 발을 디뎌 보는 것이 멀쩡하게 태어나지는 않았어도 가끔은 멀쩡할 수 있는, 멀쩡해야 하는 우리네 알량한 '인간'의, '글버러지'의, '글쟁이'들의 소임이 아닐런가?
그것은 올바른 사람의 길을 옹호하며, 인생을 탐구하며, 얄팍한 '글쓰기'로 스스로를 위무하는 글을 써본다고 깔짝거리는 자들의 사회적 책무가 아니겠는가?
일단 나의 글쓰기에 대한 1차 잡상은 여기까지.
그래서 다시 한 번
Ok, 일단 ok다.